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한글학자 독립운동가<BR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한글로 나라를 지켰던 사람들


10월은 정부가 정한 ‘문화의 달’이다. 한글날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문자는 특정 사회의 문화 성숙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축적된 문화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의 하나다. 올해가 한글날 제정 91주년이라고 하지만 면밀히 따져보면 1926년 11월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가 ‘가갸날’을 제정한 이후부터이기 때문에 93주년이 옳다. ‘한글날’의 배경에는 경술국치 이전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한글을 연구했고, 이후에는 한글을 민족의 목숨처럼 여겨 지키고자 했던 한글학자들이 있었다.
1908년 8월, 한말 주시경은 우리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표로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국어인데, 이를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므로 결국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에서 학회를 만든 것이다. 그의 뜻은 그가 운영한 강습회를 거쳐 간 이들에게 이어졌고, 목숨까지 잃어 가면서 지켜냈다. 김두봉·최현배·이극로·이희승·이윤재·한징 등이 대표적인 한글학자이다.
국어연구학회는 경술국치 이후 ‘국어’를 사용하지 못해 ‘배달말·글모음’으로 바뀐 뒤 ‘한글모’로 되었다가 1921년 12월 다시 조선어연구회로 바뀌었다. 조선연구회가 1931년 1월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로 이름을 달리한 이후 한글 연구가 본격화하였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을 발표하고 표준말을 사정하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한글 탄압이 거세질수록 한글학자들은 더욱 이에 매달렸다.
이윤재는 “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다.”라며 “일제가 조선의 글과 말을 없애 동화정책을 쓰고 있으니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글과 우리말을 아끼고 다듬어 길이 후세에 전해야 한다. 말과 글이 없어져 민족이 없어진 가까운 예로 만주족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글을 써 두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해 두면,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후에 이것을 근거하여 제 글과 말을 찾아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를 민족운동이라 했다. 당장에 독립이 되지 않고 뒤늦을지라도 한글 사전이 있으면 말과 글을 되살려 민족을 다시금 일으켜 세울 수 있으니 민족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현배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우리말본』(1937) 머리말에서 “한 겨레의 문화 창조는 언어로 이뤄진다. 한글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우리 역사의 창조적 역할을 해왔고 이제 한글 말본[문법]을 닦아 온전한 체계를 세우는 것은 뒷사람들의 영원한 창조 활동의 바른길을 닦는 것이며 찬란한 문화건설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다”라며 책 출판의 의미를 두었다. 우리 민족이 비록 일제의 식민지하에 있는 처지이지만, 우리의 문화와 정신을 계승하고 빛나게 하는데 한글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한글 연구보다는 혁명의 길로 나섰던 주시경의 수제자 김두봉도 한글 사랑만큼은 식지 않았다.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사망하였을 때 비문을 새기면서 생몰년을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4222년 3월 19일]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1924년 1월 1일] 죽음’이라 썼다. 또한 그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할 당시 평소 주장한 바와 같이 풀어쓰기로 ‘ㅈㅗㅅㅓㄴUㅣㅛㅇㄷㅐ[조선의용대]’라 썼다.



해방 후 한글학자들의 노력과 오늘날의 한글


이러한 의지를 가진 한글학자들이었기 때문에 ‘한글이 목숨이다’라고 외치면서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갖은 고문과 핍박에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 33명이 검거되었지만 이극로·이윤재·최현배·이희승·정인승·정태진·김양수·김도연·이우식·이중화·김법린·이인·한징·정열모·장지영·장현식 등 16명만 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 중일 때 그만 이윤재와 한징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1944년 9월 예심 재판부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며,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등에게 ‘내란죄’를 적용하여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들은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1945년 1월 경성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그해 8월 해방되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3년 가까운 감옥 생활로 심신이 지쳤을 법도 한데 이들은 곧장 상경하여 독립된 새나라 문화 창달을 위해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였다. 한글학자들은 가장 먼저 한글을 다시 ‘국어’로 부활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글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만을 쓰도록 강요되었기 때문에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한글을 가르치지 않아 학생들 대부분이 한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 설사 학교에서 한글을 배웠다 할지라도 그 시절 학생 수가 많지도 않아서 이를 깨우친 사람이 극히 적었다.
하지만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한글학자들은 각자의 이념에 따라 남북을 택했다. 이극로는 1948년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북협상파 일행으로 평양을 방문한 뒤 그곳에 눌러앉았다. 올해 1월에 개봉한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이다. 그는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맡기도 했지만 오로지 우리말 연구에만 전념했다. 그 결과 1966년 이극로가 주도한 것이 오늘날 북한의 표준어인 문화어가 되었다. 남한에서는 최현배와 이희승이 한글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최현배는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삼고 일본어의 한글화 작업과 더불어 한자말이 아닌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을 벌여 나갔다. 물론 그동안 중단되었던 한글 사전 편찬도 추진하였으며 한글 맞춤법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 결과 오늘에까지 전해지는 순우리말이 있다. 홀수, 짝수, 지름, 반지름, 도시락, 건널목뿐만 아니라 동물·식물 이름도 그렇다. 물론 이와 달리 이희승은 한글, 한자 병서를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한글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요즈음 한글학자들이 목숨과 같이 지키고자 했던 한글이 망가지고 있다. 표기만 한글이지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넘쳐난다. 영어 간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울 명동의 길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 나라인지 종잡을 수 없다. 외국어 학술 용어나 단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은 무슨 의미인지 찾아봐야 한다. 신조어와 줄임말 또한 편리성만을 따져 마구 쓴다. 한글화하여 사용하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대해서는 낯설어하고 촌스러워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 의식은 한글날을 맞아 여러 매체에서 문제로 지적하지만 그때뿐이다. 전문 용어일지라도 이를 우리말로 바꿀 수 없는 것인지 반문해야 한다. 한글학자들이 이러한 세태를 보고자 목숨까지 내놓고 한글을 지키려 한 것을 아니었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