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동양평화와 대한독립에 헌신한

대한국인 안중근

INPUT SUBJECT



글 전시부


동양평화와 대한독립에 헌신한

대한국인 안중근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안중근을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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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으로 나라의 힘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월(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고, 아명은 응칠(應七)이다. 아버지가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안중근도 아버지를 따라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도마(Thomas)로 하였다. 안중근은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조선역사와 유교경전을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유학자이면서 근대 신문물을 수용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도 지닐 수 있었다.
또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해외로 나가 국권회복의 길을 모색하던 안중근은 국내로 돌아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뒤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했으며,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국권회복에 힘쓰던 그는 일제에 의한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을 보면서 국내 항일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국외 독립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에 나서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에 도착한 안중근은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의 우영장(右營將)을 맡아 1908년 여름 두 차례의 국내진공작전을 이끌었다. 또한 얀치헤(煙秋)에서 동지들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조국 독립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던 중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9월 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의거 준비를 마친 안중근은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안중근은 뤼순(旅順)에 위치한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여섯 차례 재판을 받았다. 법정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를 지적하고, 자신의 의거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장 이토를 처단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본 법원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안중근은 공소하지 않고 옥중에서 자신의 자서전인 『안응칠역사』와 거사 이유를 담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다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는 안중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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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安重根)

1879.09.02. ~ 1910.03.26.

황해도 해주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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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동맹 결성 과정이 실린 ‘만고의사 안중근전(9)’

(『권업신문』, 1914.08.23.) 

계봉우는 『권업신문』에 1914년 6월 28일부터 8월 29일까지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연재하였다. 8월 23일 안중근전에는 단지동맹과 동의단지회 취지서의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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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론 

일본 군국제국주의 침략자가 축출되고 한국이 독립되면, 동양에는 영원한 평화가 지속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한(韓)·청(淸) 양 국민이 일치단결해야 함을 강조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평소 생각하던 구체적 방안을 기술하였으나 사형 집행이 당겨지면서 미완성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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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지어 보낸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 

1910년 3월 26일 사형 집행되기 5분 전에 촬영한 사진이다. 안중근의 어머니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해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편지와 함께 수의를 지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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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감옥에서 빌렘 신부, 두 동생(정근, 공근)과 면회하는 안중근   

1910년 3월 10일경에 동생과 신부와 면회하며 유언을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