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국제회의 대표 파견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BR />국제회의 대표 파견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국제회의 대표 파견

1910년대 재미 한인의 군사·외교운동 4




1918년 11월 11일 종전 선언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막이 내리자 국제사회는 향후 있을 파리강화회의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평화조건이 앞으로 어떻게 이행되고 적용될 것인가는 승전국 연합국과 패전국은 물론 전 세계 약소민족들에게 초미의 관심사로 다가왔다. 이런 때에 뉴욕에서 제2차 소약국민동맹회의가 개최되자 미주 한인들은 향후 있을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하며 외교활동에 나섰다.





이대위·안창호의 한인대표 파견 추진


1918년 11월 12일 뉴욕의 김헌식은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에게 향후 있을 제2차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에 대표 파견을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안 그래도 국제정세의 변화를 주목하던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는 김헌식의 제안을 받고 11월 14일 특별임원회를 개최해 윌슨 대통령에게 민주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전보 발송, 중앙총회의 지휘하에 시국문제의 주관과 특별의연금 모금활동 등을 의결했다. 그는 “이번 대전쟁에서 연합국과 미국의 승리는 곧 윌슨 대통령의 민주주의 승리니 세계 각 민족은 모두 자기 의향에 의지하여 그 운명을 결단하는 동시에 자유를 얻는 민족이 많을 것이라” 보고 이때를 이용해 소약국민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까지 우리의 외교활동을 시험해 볼 것을 제안했다.

이대위는 11월 1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소약국민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한 한인 대표자 파견을 공식 제안했다. 이 같은 제안은 1917년 당시 하와이지방총회의 선제 행동으로 대표 파견의 기회를 놓친 것을 의식한 기민한 행동이었다.

안창호는 이대위의 공문을 받고 가장 먼저 정한경에게 서신(1918.11.18.)을 보냈다. “제 생각에는 우리가 윌슨 대통령에게 교섭을 함으로 오늘 무슨 효험이 없을 줄 아오나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말하는 이때에 우리만 가만히 있으면 독립을 원치 아니하는 이와 같을 지라. 우리의 뜻을 발표하는 것은 가하는 듯하오이다. 형께서 이에 대하여 의견을 말씀하여 주소서.” 그런 후 이번 국제회의에 정한경을 대표로 파견하고 싶다하고 소약국민동맹회가 어떤 곳인지를 물었다. 이미 안창호의 마음속에는 정한경을 이번 국제회의 한인 대표로 점찍고 시국문제에 대한 그의 의향을 물은 것이었다.

정한경(1891~1985)은 어떤 인물인가. 1909년 6월 박용만이 만든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에 참가해 일찍이 상무주의 독립정신을 갖추었고 네브래스카주 커니사범학교와 주립대학교 졸업(1917) 후 노스웨스턴대학교 경제학과에 조교로 재직 중에 있었다. 그는 191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막된 만국박람회 때 일장 연설로 주변을 놀라게 한 적이 있는데, 이때 처음 안창호를 만났다. 네브래스카에서 공부할 때 한인학생동맹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중국인 유학생 잡지 『The Chinese Students Monthly』에 기고하는 등 뛰어난 언변과 대외 활동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 그는 대전 종결이 선언된 1918년 11월 11일 재미 한인 동포들에게 보낸 장문의 영문 편지에서 한인 대표자를 뽑아 국제회의를 대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영어 구사력과 탁월한 지식을 소유한 이승만을 한인 대표자로 추천하였다. 안창호가 젊은 정한경에게 가장 먼저 시국문제를 협의하고 대표로 천거하고 싶다 한 것은 그만한 자질을 갖춘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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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 개최 전단지

  





소약국민동맹회의 한인대표

이승만·민찬호·정한경의 선출과 선전·외교활동


안창호는 1918년 11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국문제 논의를 위한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개최했다. 임시협의회는 “파리강화회의와 소약국민동맹회의에 한인 대표자의 파견은 대한인 전체 민족의 대사건”으로 간주하고 7가지 사안을 의결했다. 그중 주요 의결 내용은 중앙총회에서 향후 있을 모든 외교문제를 총괄하고, 이승만· 민찬호·정한경을 한인 대표자로 선택해 소약국민동맹회의에 보내되 정한경은 파리강화회의 대표자로 선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의결 내용은 『신한민보』 11월 28일 자 호외로 공포되었다.

소약국민동맹회의는 1918년 12월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간 뉴욕 맥알핀 호텔에서 개최되었다. 1917년에 이은 두 번째 국제회의였다. 하와이 정부의 미허가로 아직 출발하지 못한 이승만을 제외한 한인 대표 민찬호와 정한경은 12월 10일부터 19일까지 뉴욕에 체류하며 대회 참가와 함께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두 사람은 이승만·정한경·민찬호의 이름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과 상원을 대상으로 독립청원서를 보냈고 언론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에도 매진했다. 한편 1918년 11월 중순경 뉴욕에서 결성한 신한회는 김헌식을 한인 대표로 소약국민동맹회의에 보냈는데, 김헌식은 이번 대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대회 기간 내내 대한인국민회 대표와 신한회 대표 간 유기적인 교류나 협조는 없었다. 

제2차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에는 24개국 약소민족 대표들이 참가했으나 과거 1차 때보다 미국 언론의 주목을 덜 받았다. 대회를 주관한 회장 하우(Frederic C. Howe)가 약소국 대표의 강화회의 출석권 교섭을 위해 대회 개최 전 파리로 건너간 데다 국제 여론의 관심사가 온통 파리에서 있을 강화회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 일본에서 발행된 『Japan Advertiser』(1918.12.18.)와 『대판조일신문』(1918.12.15./12.18.) 등에서 한국인 대표의 소약국민동맹회의 참가활동 사실을 보도하였다. 이 같은 보도는 당시 국제정세 변화에 주목하며 장차 2·8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재일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대한인국민회의 소약국민동맹회의 참가는 파리강화회의 외교를 위한 사전 작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이틀 만에 끝난 소약국민동맹회의 종결 직후 최대의 관심사는 파리에서의 외교활동이었다. 그런데 파리 파견 대표자로 정한경만 선정된 데 대해 미주 한인사회 곳곳에서 왜 이승만과 같은 인물을 대표로 뽑지 않았는가에 대한 문의가 대한인국민회로 쏟아졌다. 이러한 여론에 직면한 안창호는 1918년 12월 23~24일 임시협의회를 개최해 7인(임정구, 황사선, 최진하, 최응선, 이건영[백일규], 송창균, 홍언)의 임시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국민대회 개최 건과 아울러 파리강화회의 대표자로 이승만을 추가하는 것으로 의결했다. 이승만을 추가 선정한 것은 그를 국제외교의 적임자로 본 때문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하와이지방총회와 북미의 한인들을 결집하기 위한 의도 때문이었다. 모처럼 다가온 기회를 이용해 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사회를 단결시키고 그 힘으로 한인 대표파견을 위한 특별의연금 모금활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