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한인들은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들의 노력을 다 바쳤다.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굳게 단결하여 한인사회를 안정시키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3·1운동이 발발한 뒤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경제적 원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09년 5월 9일,멕시코 유카탄

고된 노역 속에서 염원한 독립
1909년 5월 9일, 멕시코 유카탄에 세워진 한인단체
1909년 5월 9일 멕시코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에 일하던 한인대표 70명이 메리다(Mérida)에 모였다. 앞으로 사흘만 지나면 4년 동안의 강제노역에서 해방이 되는 그들이 모인 이유는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 창립대회를 개최하기 위해서였다.
‘국민회’는 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미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통합하여 탄생한 미주 최대의 한인단체이다. 국민회는 멕시코에서 강제노역을 하는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황사용과 방화중 두 명을 견묵위원(遣墨委員)으로 파견하고, 멕시코 한인들과 함께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를 창립하여 조국의 국권회복운동에 힘을 보탰다.
메리다 지방회 창립대회가 열린 장소는 대한의 국기와 멕시코의 국기가 걸리고 온갖 꽃으로 장식이 되어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70여 명의 한인대표들과 멕시코 현지인들로 빈틈이 없었다. 미국에서 온 국민회 대표가 회의를 인도하고, 메리다 지방회의 임원들이 선출되었다. 멕시코 한인들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대단히 성대한 창립대회였다. 그렇게 멕시코 한인의 권익을 옹호하고 조국의 독립을 후원하는 최초의 단체, 메리다 지방회가 탄생했다.
1910년, 멕시코 각지에 설립된 대한인국민회
미주의 ‘국민회’는 1910년 2월 1일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로 다시 확대되며 해외 한인 대표기관이자 미주 최고의 한인단체가 되었다. 에네켄 농장에서 해방된 멕시코 한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찾아서 멕시코 각지로 흩어졌다. 프론테라(Frontera)로 이주한 300여 명은 가옥을 건축하고 토지를 개간한 뒤, 그곳을 ‘새로운 한국’이라는 의미의 신한동(新韓洞)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프론테라지방회를 설립하여, 동포들의 환난상구와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베라크루스(Veracuruz)주 남쪽 끝에 있는 와하케뇨(Oaxaqueno) 에서도 300여 명의 한인들이 새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미국인이 경영하는 사탕수수농장과 제당공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오학기나(한인들이 와하케뇨를 일컫던 말)지방회를 중심으로 상호 단결하여 민족의 이익을 도모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밖에도 유카탄의 한인들은 멕시코시티(Mexicocity), 타마울리파스(Tamaulipas)주, 탐피코(Tampico), 베라크루스(Veracruz)주, 베라크루스·산타페(Santa Fe)·푸엘토멕시코(Puerto Mexico)·코앗사코알코스(Coatzacoalcos), 소노라(Sonora)주 엘티그레(El Tigre)· 에르모시요(Hermosillo) 등지로 이주하였다. 한인들이 모이는 곳에는 대한인국민회의 지방회 혹은 경찰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191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도산 안창호의 멕시코 순행
멕시코 한인들은 4년 만에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의 강제노역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1910년 멕시코혁명이 발발하며 생활난이 매우 심각해졌다. 1914년 멕시코혁명이 본격화되면서 물가가 올라 한인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전보다 더욱 악화되었다. 혁명군의 침략으로 각지에 흩어졌던 한인들은 비교적 안전한 유카탄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1917년, 멕시코 혁명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에네켄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들을 찾기 시작했으나 유카탄의 한인들은 신용을 잃어버려 오히려 일을 잃게 되었다. 이에 멕시코의 한인사회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도움을 청하였고, 중앙총회장 도산 안창호가 멕시코로 향하게 되었다.
안창호는 1917년 10월 1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하여, 10월 26일 멕시코시티에 도착하였다. 멕시코시티에서 학질에 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크게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정을 이어 베라크루스·코앗사코알코스·프론테라를 거쳐 12월 2일 메리다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12월 3일 안창호는 유카탄의 한인들을 상대로 ‘대동 일치’라는 제목으로 3시간의 연설을 하였다.
안창호는 유카탄 한인들의 생활을 일일이 조사하고 개선점을 찾았다. 멕시코 한인이 봉착한 가장 큰 문제는 신용을 잃어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한인들의 신용을 되찾기 위해서는 한인사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렇게 안창호는 한인들이 신용을 되찾고, 그들이 성실한 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 메리다 노동규정」을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그 후에도 안창호는 유카탄 한인의 교육, 조혼, 위생, 청결, 축첩제 등 많은 부분을 개선해 나갔다. 심지어 화장실을 설치하여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는 일까지 처리하였다.
안창호는 에네켄 농장주를 찾아다니며 한인의 신용을 회복하는 데에 힘을 쏟았고, 생활개선을 통해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자가 될 것이라 약속하였다. 그에 그치지 않고 멕시코 한인사회의 자립을 위해 회사를 세우려고 자본을 모집했다. 유카탄에 온 지 1개월도 안 된 1917년 12월 11일경 그가 모집한 돈은 1만 페소나 되었고, 1918년 4월까지 1만 7천 페소, 그해 4월 말에는 1만 8천 페소를 모았다. 안창호는 멕시코에 도착하자마자 학질과 같은 풍토병에 걸렸고, 치통과 위장병 등으로 크게 고생했으나 짧은 시간에 멕시코 한인사회를 개선시키고 경제적으로 자립을 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방회관
1919년 3월, 멕시코에 울려 퍼진 만세 소리와 독립운동자금 모집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1919년 3월 9일 오전 11시, 중국 상하이의 현순으로부터 서울에 있는 민족대표들이 우리 민족이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포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안창호는 곧바로 멕시코시티 회장 이건세, 탐피코의 김익주에게 그 소식을 전보로 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멕시코의 모든 대한인국민회 지방회에 3·1독립선언의 소식이 전해졌다. 멕시코의 한인동포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고, 거의 매일 국민회관에 모여 3·1운동 이후의 운동 방향에 대해 토의를 계속하며 그것을 지원하고자 했다. 프론테라지방회에서는 「 3·1독립선언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멕시코 각처의 교회에 보내 독립 의지를 널리 알렸다.
3·1독립선언 이후 멕시코의 대한인국민회에서는 한 사람당 1페소의 의무금을 거두어 독립의연금을 마련했다. 메리다 지방회에서는 독립의연금 21례를 거두어 수금되는 대로 레굴라도 은행에 입금하였다가 환전하여 중앙총회로 보냈다. 1919년 8월부터는 멕시코에서 거둔 독립의연금을 모두 은화나 금화로 바꾸어 중앙총회에 보내었다. 메리다 지방회의 한인들이 1919년 12월 1일까지 중앙총회에 보낸 돈은 ‘21례’ 800달러와 인구세 150달러 등 약 1,000달러에 달하였다.
3·1독립선언 이후 한국민의 열망이 모여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20세 이상 국내외 모든 한인들은 1년에 금화 1원을 인구세로 내게 하였다. 멕시코의 한인들은 북미나 하와이에 비하여 경제력이 현저하게 낮기 때문에, 인구세 1달러를 낼 수가 없었다. 생활난으로 인해 유카탄의 한인들은 인구세로 멕시코 돈 1페소(미화 50센트)를 내게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된 이후 멕시코의 한인들도 한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인구세를 냈다. 유카탄에서 인구세를 모집하여 미국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우편환으로 보냈고, 미국에서는 이를 상하이로 보냈다. 임시정부에서는 1919년 5월 27일 재정 확보를 위해, 애국금 3백만을 모집하기로 결정하였다. 비록 멕시코 한인들은 모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남루한 옷을 입었을망정 질식해 죽어 가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참고 견뎠다. 멕시코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경제난이라는 커다란 장벽에도 불구하고, 국민회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한인사회를 안정시키고 나아가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멕시코 이민선 일포드(Illford)호

국외사적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방회관(64깔레)
위치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64깔레 428 x 53 y 49
1909년 5월 9일 유카탄(Yucatan, 有佳團) 에네켄(henequen) 농장에서 노동에 종사했던 한인들을 중심으로 메리다 지방회가 설립되었다.
『신한민보』 에 따르면, 1909년 5월 당시 메리다 지방회에 회원으로 가입한 한인은 305명이었다. 처음으로 사용한 메리다 지방회관의 주소는 ‘Calle 64 NO. 428’이다. 메리다 지방회관은 2003·2015년 조사 당시 약 30평 정도의 건물이 창고로 사용되고 있었다. 2024년 현재 숙박시설(Las Tres Marias Hotel Boutique)이 들어서 있다. 협조를 얻어 내부를 살펴본 결과 안쪽으로 건물을 확장하고 리모델링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