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이민 그리고 독립운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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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운명’처럼 여겨지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신대현 님에게는 묻힐 뻔했던 외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역사를 우연히 발견한 일이 그랬다. 춘천 자택에서 만난 그는 외할아버지의 사진을 넣어 직접 제작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뒷면에는 故 신을노 선생이 독립 결의를 담아 쓴 ‘피 뿌려 얻은 자유 참되고 거룩하다. 남에게 애걸 말고 내 피로 자유 사자’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다. 그는 티셔츠 속 외할아버지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가리키며 “닮지 않았느냐?”고 연신 물었다.
외손주의 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신을노 선생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다. 하와이주립대학교 한국학연구소(소장 이덕희) 소장 자료에도 호놀룰루 카훌루이 지역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꾸준히 낸 기록이 선명히 남아 있다.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의 시작은 1902년이었다. 1825년 하와이에서 대규모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한 미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조선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첫 이민자들이 하와이로 떠난 이듬해인 1903년 12월 5일, 당시 열 살이었던 신을노 선생은 아버지를 따라 도릭호(S.S. Doric)에 몸을 싣고 하와이로 떠났다.
1922년 자신처럼 한국인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사라 성’과 결혼한 후 자녀들을 낳았고, 사탕수수 농장에서 번 돈으로 1938년 ‘신 가구점(Shin Furniture Store)’을 개업했다. 1942년 하와이 중한민중동맹단, 한미공채위원회 위원,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집행위원 등을 맡았다. 조선민족혁명당은 1935년 중국에서 5개의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해 만들어진 정당으로, 신 가구점에 딸린 뒷방이 하와이 독립운동가들의 모임 장소로 쓰였다.
-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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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는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 진학을 위해 1946년 하와이를 떠났고 이후 덴마크계 미국인인 아버지와 결혼해 뉴욕에 정착하셨죠.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가족들도 잘 몰랐어요. 같은 미국 하늘 아래 살았지만 저도 외할아버지를 만난 건 두 번뿐이었거든요. 다섯 살 무렵 외조부모님이 뉴욕에 오셨고, 1963년 여름엔 누나와 같이 하와이에 가서 3개월을 살았어요. 그때 여덟 살이었는데 하와이에서 자전거 탔던 일, 삼촌에게 서핑 배웠던 일들이 기억나요. 외할아버지는 매우 과묵하셨어요. 영어를 못하셔서 말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살로메 이모 말씀으로는 영어를 꽤 잘하셨대요.”
신대현 님은 꼭 한 번 한국에 가보고 싶었다고 했다. 특히 어머니와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2020년, 향년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그 꿈은 사라졌다. 이후 콜로라도에 있는 한인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그는 한국인이 아닌 자신이 왜 그곳에 나가고 있는지 자신조차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한인 교회를 다니며 깨달은 건 그것이 한국 이주를 위한 준비 단계였다는 사실이었다. 신대현 님은 좋아하는 쇼트트랙 선수 ‘황대헌’과 비슷한 이름의 ‘대현’으로 짓고, 외할아버지의 성을 따랐다. “저는 족보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살로메 이모가 외할머니댁 성(Sung)씨, 외할아버지댁 신(Shin)씨 가문을 합한 가족 계보를 만드셨는데 워낙 대가족인 데다 교류 없는 친척이 많았죠. 흥미로운 점은 성씨 가문은 기록이 정확히 맞물리는데 신씨 가문은 구멍 난 정보나 뒤섞인 조각이 너무 많았어요. 가용한 자료를 논리적으로 맞추고 싶어 하는 과학자로서의 기질이 발동한 이유였죠.”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외할아버지의
업적을 알렸다는 것이 가장 기뻤습니다.
업적을 알렸다는 것이 가장 기뻤습니다.
- 오늘에야 되살린 외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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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 집안’의 흩어진 조각들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외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도 커졌다. 신대현 님은 자신의 삶에 ‘8월 15일’이라는 날짜가 자주 등장했다고 말을 이었다. 콜로라도에 살던 시절, 토요일 아침 사이클 훈련을 마치고 나오는 그의 눈에 한글이 적힌 텐트들이 공원 가득 놓여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한인들이 주최하는 8·15 광복절 기념행사였다. 한국 이주를 결심하고 6주간의 사전 탐방을 떠났을 때, 인천공항에 도착한 날 역시 2022년 8월 15일이었다. 첫 방문이었던 그때 “한국에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외할아버지가 한국인이라 F-4 (재외동포 비자) 비자 발급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1955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신을노 선생이 한국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자료를 제출해야 했다. 변호사의 도움으로 외할아버지 일가의 도릭호 승선 기록을 찾았고 하와이 이민 이후의 삶, 독립운동에 참여한 기록들도 하나둘 드러났다.
“2024년 2월 14일 전까지 ‘독립유공자’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비자 업무를 도와주던 변호사가 그 단어를 말해주었을 때도, 한국 정부로부터 서류 없이 F-4 비자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중대한 의미라는 것 외에는 잘 몰랐습니다. 외할아버지가 한국 독립운동사에 기여한 바를 알아가면서 그 공로가 이 나라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죠.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외할아버지의 업적을 알렸다는 것이 가장 기뻤습니다. 2025년 8월 12일, 제80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특별귀화자가 되었을 때는 울컥했습니다.”
신대현 님은 ‘에너지 독립’에도 관심이 많다. 독립을 위해 적극 나섰던 외할아버지처럼 ‘한국사람 신대현’ 님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한국의 에너지 독립에 일조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
특별귀화 제도 외국인이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국적법」 제5조에 규정된 일반귀화 요건을 충족해야 하나 독립유공자 후손 등 특정한 경우, 거주기간 요건 등을 면제해 주는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