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이방인

한국인에게 ‘독립’ 희망을 심어준 장보어링

한국인에게 ‘독립’ 희망을 심어준 장보어링

글 양지선 단국대학교 연구교수


한국인에게 ‘독립’ 희망을 심어준 장보어링(張伯苓)


장보어링(張伯苓)은 중국의 톈진(天津)에 난카이(南開)중학과 난카이대학을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근대사에서 최고의 구국교육운동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鄧穎超)는 장보어링의 제자로 유명하다.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지도자 저우언라이는 스승 장보어링의 생애를 ‘진보와 애국’으로 정의한 바 있다.

          


      

중국 애국지사 육성에 공헌하다
장보어링은 또한 근대 활극(活劇)의 창시자이자 올림픽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연극과 운동은 학생들에게 정서함양과 상무정신을 고취시키는 유효한 방안 중 하나였다. 곧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는 동시에, 이를 위한 실천력을 배가시키는 요인이었다. 장보어링의 절친한 친구는 그에 대해 “동시대 중국의 걸출한 인물들과 비교하면 그들의 기교 있는 삶의 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단순한 사람이지만, 매우 근면 성실하고 학생들에게도 친절해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교육활동을 통해 한국인과 인연을 맺다
1876년 허베이성(河北省) 톈진에서 태어난 장보어링은 열강의 침략 속에 북양 대신 리훙장(李鴻章)이 설립한 배이양수학당(北洋水學堂)에 입학해 1894년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군사구국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신념으로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국기가 세 번 바뀌는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해군만으로는 구국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근대학교를 세워 강건한 국민을 배양하고자 결심하였다.
톈진으로 돌아온 장보어링은 교육운동가 옌시우(嚴修) 등의 도움으로 1904년과 1919년 난카이중학과 난카이대학 등을 차례로 설립했다. 이때 자신이 세운 난카이중학에서 처음으로 한인 유학생들과 조우하였다. 난카이중학 조선인 기숙사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박용태와 만나게 되면서 한국의 식민지 현실을 알게 되었다. 장보어링은 단순히 동정에만 그치지 않고 다양한 방면에서 한국독립운동 세력에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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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어링(張伯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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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콜롬비아 명예박사 학위 수료(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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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周恩來)와 부인 덩잉차오(鄧穎超)

          

한인 유학생들의 스승을 자임하다

1919년 3·1운동 발발 이후 많은 청년학생들이 피체를 피하기 위해 혹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해외 유학을 선택하였다. 적지 않은 인원이 톈진으로 유학하여 장보어링이 세운 학교에서 수학하였다.한인 학생들은 유학생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중국의 혁명활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톈진지역의 한국독립운동 세력과 함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신변의 위험으로 경제적 활동은 사실상 어려웠다. 그런 만큼 학생들의 생활비와 학비 마련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이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장인 장보어링의 특별한 배려 덕분이었다.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은 학비가 부족해 입학하지 못할 처지에 놓이자, 직접 장보어링을 찾아갔다. 사정을 들은 그는 이규창의 입학과 학비문제를 해결해주는 등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열심히 공부해 한국의 독립에 이바지하라는 격려 또한 잊지 않았다. 당시 이규창은 재학 중 한겨울에 바지 솜을 두루마기 안에 덧대어 겨우 추위를 면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까지 도보로 통학하였다. 체육시간에 이를 본 중국인 학생들이 이규창에게 ‘망국노(亡國奴)’라고 놀리자, 장보어링은 “이규호는 부친과 대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에 온 사람”이며, “오히려 그의 행동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꾸짖었다.한인 학생들에 대한 그의 격려와 지지는 난카이대학 내 독립운동단체 조직으로 이어졌다. 1920년 박용태는 대학 내에 학생회를 조직하여 3·1운동기념 전단을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0년에는 대학 내의 한인학우회(韓人學友會)를 한인 학생들에게 직접 소개해, 이를 기반으로 한국독립청년당이 조직되었다. 한국독립청년당은 ‘중한호조친밀(中韓互助親密)로 제국주의 타도’라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처럼 교내에서 항일단체를 조직·활동한다는 것은 교장의 지지와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인 독립운동 세력에 재정적인 지원을 도모하다

장보어링은 한인 학생들뿐만 아니라 톈진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운동 세력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주로 재정을 지원하거나 활동에 도움이 되는 유력인물 혹은 단체를 소개해 주었다. 톈진지역 최초의 한인독립운동단체 불변단(不變團)은 유력한 중국인과 미국인의 원조를 받았다. 불변단은 텐진지역에서 상하이 신한청년단이 발행한 기관지 『신한청년(新韓靑年)』을 배포하는 임무를 맡았다. 중국기독교청년회 15주년 대회에서도 이를 배포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톈진기독교청년회의 동사장이 바로 장보어링이었다. 톈진지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장보어링의 지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생활방면 등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쳤다. 유기석은 허베이성에 농장을 설립해 만주지역의 한인들을 이주시키기로 마음먹고 자금 마련을 위해 장보어링을 찾았다. 여러 이유로 농장 설립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그는 유기석을 이스바오사(益世報社) 사장 류쥔칭(劉俊卿)에게 소개하였다. 당시 박용태는 이스바오사 사장이 장보어링의 소개편지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유기석을 안심시켰다. 그의 경제적인 지원이 톈진지역에서 어떠한 비중과 의미를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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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이대학 전교생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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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청년(新韓靑年) 창간호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에 나서다
박용태를 통해 김구와 안창호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한중연대를 논의·모색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임시정부의 외무위원과 내무차장 등을 역임한 현순(玄楯)은 ‘조선과 가까운 친구들’이라는 메모에서 톈진지역 인사로 장보어링을 꼽았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 8월 13일 백영엽과 황진남을 톈진에 파견한다. 파견 목적은 장보어링을 방문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새롭게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상의하고자 했던 주요 의제는 미국의원단과 면회 문제였다. 기독교인으로서 미국선교사들과 가깝게 지내던 그에게 의원단과의 면담 주선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장보어링의 소개와 지원은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장보어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 특히 노동국 총판이던 안창호와 오랜 시간 교류하였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신자로서 청년 교육에 대해 공통되는 관심사가 많았다. 안창호는 톈진에 갈 때마다 그를 찾았다. 난카이대학 학생회 부회장을 맡았던 이만근에 따르면, 안창호는 대학을 방문해 한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강연한 뒤에는 항상 총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한중이 합동하여 일본을 저지할 방도와 중국에 있는 한국 청년들의 교육에 대해 오랜 시간 의견을 나누었다. 그 결과, 미래 한중연대의 토대가 될 인재양성을 위해 한인 학생들의 난카이대학 입학이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 10월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 등 한인 학생 5명이 이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돈독한 한중연대로 침략세력에 맞서다
1938년 3월 10일 오랜 지우(知友)이자 동지인 안창호가 서거하였다. 장보어링은 전시 중임에도 4월 17일 충칭시(重慶市) 상회에서 거행한 추도회에 직접 중국 측 대표로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안창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고 교제를 하여 왔는데, 안창호는 조선에서 위대한 인물로서, 본인이 이룩한 조선독립운동상의 사적은 그 역사상에 찬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중략) 그분은 사망하였으나 그의 정신은 아직도 친구의 동포인 조선 사람의 뇌리에 빛나고 있으므로 조선인 여러분은 계속하여 안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아 어디까지나 조선독립이 완성될 때까지 만전의 노력을 발휘하여 주기 바랍니다. 그 수단으로서는 특히 조선 사람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나, 조선은 지역적으로 협소한 만큼 그 민족의 수도 적으므로, 유감없는 결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역사상 또는 현재의 정세로 보아 방대하고 심원한 유력 중화민족과 충분한 협조를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보어링은 깊은 애도를 표하며 안창호의 유지를 이어받아 독립운동에 만전을 다할 것을 부탁하고, 부족한 독립운동의 역량을 중국과 연대를 통해 해결하자고 제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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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와 황진남(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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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어링 유훈(遺訓)

          

한인들에 대한 장보어링의 지원은 한중연대의 일환에서 이루어졌다.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성원은 대부분 간접적인 방식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도움은 오랫동안 다양한 방면에까지 미쳐 한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가장 힘든 때에 끊임없이 손을 내밀어준 그에게 이제라도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