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출귀몰한 농민의병장, 김수민’

‘신출귀몰한 농민의병장, 김수민’

글 학예실


신출귀몰한 농민의병장
김수민(金秀敏, 1867~1909.12.17)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김수민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그는 뛰어난 전술로 일제의 눈을 피해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대표적인 농민의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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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병장 김수민의 독립운동

일찍이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반일투쟁을 경험한 김수민은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활동에 나섰다. 그해 9월 2일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장단군 북면 솔랑리에서 인근의 산포수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부대는 개성군 대흥산 창고에 보관 중이던 정부 소유의 대포 30문과 소포 150문을 빼앗아 무장하였고, 이후 병력을 장단군 덕음동으로 이동시켜 그곳을 거점으로 군량을 비축하였다. 또한 김수민은 보부상들을 정보대(情報隊)로 이용하여 주변뿐만 아니라 먼 지역 일본군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의병들의 보호와 전투력 향상을 위해 복장을 송백(松柏)의 위장색으로 염색하도록 하였다. 군수품을 보급하는 데 있어서는 어려운 농민들에게 도움을 요구하지 않고, 부자들의 쌀과 옷을 징발하였다. 의병부대를 이동시킬 때도 농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여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의병부대의 조직과 무장을 강화한 김수민은 경기 장단·마전 지역을 중심으로 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1907년 10월 고랑포(高浪浦) 헌병분파소를, 11월에는 풍덕군 영비포(領非浦) 헌병분파소를 공격하여 불태웠다. 1908년 초에는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13도창의대진소 연합의병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1908년 2월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되자, 이후 김수민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장단군 방면으로 되돌아와 유격전을 기본 전술로 하는 의병부대로 재편성하였다. 1908년 4월 20~30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구화장(九化場) 헌병분파소를 공격했으며, 10월에는 근거지를 점차 남쪽으로 이동시켜 강화도를 기습 공격하는 등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그해 11월 대대적인 의병탄압작전을 펼쳤고, 이로 인해 김수민이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활동은 전에 비해 침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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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킨 양위조칙 반포에 관한 기사(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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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해산에 항거한 1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순국으로 분개한 대한제국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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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1894년)

새로운 항일투쟁의 시도와 순국

김수민은 일본군 정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총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서울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경부(京部) 이화령(梨花寧)과 북부(北部) 제동(齊洞)에 거주하며 인력거꾼(車夫)으로 위장하여 활동하면서 자신이 이끌던 의병부대의 지휘를 동생이자 선봉장이었던 김백수에게 담당케 하였다. 그러나 활동상황이 일본경찰에 포착되어 김수민은 1909년 8월 12일 오후 1시 부하 2명과 함께 붙잡히게 되었다. 체포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0월 14일 교수형이 결정되어 그해 12월 17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김수민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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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창의대진소 서울진공작전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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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이 활약했던 강화도 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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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을 비롯한 의병장들의 항쟁을 기록한 『정미의요창의록(丁未義邀彰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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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판결문(1909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