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답을 찾다

대의를 위한 작은 일상의 가치

대의를 위한 작은 일상의 가치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대의를 위한 작은 일상의 가치


일제강점기 오욕의 35년 동안 대한독립을 위해 투신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채 밝혀지지 않은 선열들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중 ‘여성’ 독립운동가를 찾기란 난망한 일이다. 남성 위주의 역사 서술과 ‘일상의 유지’를 홀대한 이유 때문이다.



독립운동 속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
“항일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투사 집으로 시집간 것도 다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의 운명 때문에 한 개인의 운명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 허은 여사의 회고 中 -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왕산(旺山) 허위 집안의 손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국무령(대통령)인 이상룡의 손자며느리이자, 청성진 경찰주재소 습격사건으로 유명한 이병화의 아내. 항일투사 집에 태어나 항일투사 집안의 남자에게 시집간 허은은 태생부터 독립운동의 길이 주어졌던 여인이었다.
▲190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출생 ▲1915년 가족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이주 ▲1922년 이병화와 결혼 ▲1932년 시할머니 김우락과 시부모를 모시고 안동 임청각으로 귀향 ▲1952년 6·25전쟁 중 남편 사망 ▲1997년 9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남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들도 누군가의 자식이자, 배우자, 부모일 텐데 그 일상은 어떻게 유지되었을까?”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생활이 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가는 ‘일상의 삶’을 어떻게 유지했을까? 바로 그들의 어머니,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허은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땟거리는 부족했다. 삼시세끼가 녹록치 않았다. 점심 준비를 위해 어느 땐 중국인에게서 밀을 사다가 마당의 땡볕에 앉아서 맷돌로 가루를 내어 반죽해서 국수를 해먹었는데 고명거리가 없어 간장과 파만 넣었다.”
허은의 시가는 이상룡의 집이다. 시할아버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국무령이었고, 그의 손자이자 허은의 남편이었던 이병화는 대한통의부, 한족노동당 등의 간부로 활동했다.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는데,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보면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경제적 궁핍과 곤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허은을 비롯해 많은 여성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가족들을 위해 밥을 짓고, 옷을 꿰맸다. 가뜩이나 부족한 살림 가운데 배고픔과 고난은 나날이 심해졌다.


화려한 성공 뒤 묵묵히 일상을 지탱해준 존재
“시집온 다음해에 한 번은 감기가 들었으나 누워서 쉴 수가 없었다. 무리를 했던지 부뚜막에서 죽 솥으로 쓰러지는 걸 마침 시고모부가 보시고는 얼른 부추겨 떠메고 방에 눕혔는데 다음날도 못 일어났다. 그때가 열일곱 때였다.”
“나도 옷을 숱하게 만들었다. 그중에도 김동삼, 김형식 어른들께 손수 옷을 지어 드린 것은 지금도 감개무량하다.”

공기조차 얼어붙게 만든다는 서간도의 모진 추위를 견디며 허은은 독립운동가들의 끼니 걱정과 입을 옷이 부족하다는 압박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99칸에 달하는 임청각 종택의 안주인이 만주 허허벌판으로 달려가 몸이 부서져라 밥을 하고, 옷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은 일절 없었다. 허은은 앞으로의 인생을 예고하듯 험난했던 신행(新行)길을 떠올리며 조국의 운명과 자신을 등치시켰다.
“이천팔백 리 먼 길은 내 시집가는 길이요. 앞으로 전개될 인생길의 험난함을 예고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국의 운명이 순탄했으면 그리되었겠는가?”
독립운동가들은 몸소 한평생 인생을 걸고 지켜나가야 할 신념과 대의(大義)를 말했다. 그러나 영웅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기본적인 일상의 삶을 영위해 나가야 했다. 일상이 유지되고, 이로써 그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허은과 같은 어머니, 아내, 딸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람들은 주로 성공 그 자체와 그것을 이룬 주인공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만, 그 뒤에는 일상을 지켜준 숨은 조력자들이 있다. 목표를 달성하고 어떠한 성과를 얻기까지, 특히 그것이 가진 가치와 결과물이 클수록 주변의 도움과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종종 과소평가되곤 한다. ‘일상의 유지’는 성공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바탕이다. 우리의 일상은 그냥 돌아가지 않는다. 자칫 간과하기 쉬운 반복적인 생활에는 그만큼 꾸준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삶이 유지된다.

독립기념관이 개관 30주년을 맞이했다. 30년이면 이립(而立)의 나이다. 그동안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내가 밟고 서 있는 땅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두발로 서기까지 음지에서 이를 지탱해 준 ‘작지만 없어선 안 될 존재’들을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일상의 유지를 벗어난 삶은 존재할 수 없다. 묵묵히 일상을 지탱해주었던 많은 이들의 삶이 우리가 이룬 성취와 맞먹는 중요한 일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이성주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