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신사참배 거부’의 격랑에 몸을 던진 여교사, 김두석

‘신사참배 거부’의 격랑에 몸을 던진 여교사, 김두석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글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사연구소장


‘신사참배 거부’의 격랑에 몸을 던진 여교사, 김두석


김두석은 1915년 11월 경남 마산 성호동에서 독실한 기독교 교인인 부친 김규태와 모친 허영 사이에 태어났다. 일찍이 종교와 근대교육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해 비난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당당한 여성독립운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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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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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모습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인가, 우상숭배인가
암흑의 시대, 평양의 신학교는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예비검속을 받았다. 익숙한 이름의 주기철·송영길·채정민·이기선·한상동·주남선 목사 등이 예비검속을 통과하지 못할 경우 총회는 결렬될 위기였다.
살벌했던 1938년 9월.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추방당하고 말았다. 신앙의 순수성이 위배당하자, 이들은 만주·미국·캐나다·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려움은 계속됐다. 직장마저 쫓겨났고, 평양신학교는 폐교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이들은 검속되어 형무소로 보내졌다. 조선에 대한 역사침탈을 넘어 조선인을 향한 정신침탈 그 자체였던 것이다.
궁성요배(宮城遥拝)는 신사참배 수준을 넘는 동방요배(궁성요배)의 강요였다. 신사참배를 강제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일본 천황을 향해 충성을 맹세하고 큰절과 예배를 강요했다. 기미가요 제창·일장기 게양·충성 맹세 등 일제의 잔학한 횡포는 전국에 불어 닥쳤다.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 산과 토굴로 향했다. 산속, 집에서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하며 순교자의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대의 풍랑 속에 수많은 종교인들은 무기 없는 저항을 반복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고향 지역의 종교와 사회 인식에 영향을 받아 성장하다
마산은 주기철, 한상동 목사 등 유명한 종교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역이다. 그 영향으로 지역 일대에는 남녀평등과 인간존중에 무게를 두고,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인식이 확산되어 있었다.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와 유달리 일찍이 호기심이 강하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김두석을 눈여겨 보던 교장은 그녀를 호주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부산 동래일신여학교에 추천해 진학하게 했다. 1930년 3월 23일자 『동아일보』에는 의신여학교 우등 졸업생으로 언급된 김두석의 기사가 실렸다.
1899년 마산포 개항 이후, 김두석은 경남의 해상상업중심지로 떠오른 마산과 해양관문인 부산을 오가며 문물 교류·종교 유입·한일상권 경쟁 등 시대변화를 고스란히 느끼며 성장했다. 또한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브나로드운동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는 계기를 맞았다.
김두석은 상급학교 진학을 꿈꾸었으나 경제적 한계에 부딪혀, 졸업 후 마산 의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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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석이 의신여학교 우등졸업생으로

소개된 기사(동아일보 1930년 3월 23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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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나로드운동 관련 기사(동아일보 1932년 8월 4일자 기사)

신사참배 강요에 당당히 맞서다
1937년 9월 조선총독부는 각 학교에 고시를 내렸다. 신사참배는 국가의 의식이니 각 교육기관에서는 교장과 교사들 인솔하에 전교 학생들이 신사에서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마산 의신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김두석도 동일한 현실에 직면해 있었다. 교사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맞닥뜨린 신사참배 강요 명령은 김두석을 암흑의 소용돌이로 내몰았다. 교육계와 종교계는 즉각 반발하며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평양의 숭실학교·숭실전문학교·숭의여학교 등이 뜻을 함께한 가운데 그녀도 신사참배 거부에 합류했다.
“저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습니다.”
“왜 못한다는 거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시는 죄가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학교일을 그만두게.”
경찰서 출두명령을 받고 연행되기를 수차례, 결국 5년간 몸담았던 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말았다.


비록 죽을지언정 의지를 꺾지 않다
1939년 4월 주기철 목사의 가석방 이후, 김두석은 평양 여자신학원에 입학하였다. 기숙사는 새벽이면 일제의 감시를 벗어난 설교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의욕은 자유로운 설교와 독립을 향한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찼으나, 긴장과 안도의 한숨이 반복되었다. 기숙사의 비밀수업은 사복경찰의 끈질긴 추적으로 좌절되기 일쑤였지만, 김두석의 신사참배 거부의지는 더욱 완강해졌다. 그리하여 1940년 5월 17일부터 1941년 7월 30일까지 신사참배 거부와 일제의 식민정책에 반대한 것으로 5회에 걸친 구금과 28일간의 수감생활을 겪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녀의 굳은 의지는 꺾일 줄 몰랐다. 신사참배와 일본비판문제로 다시 체포된 그녀는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1944년 9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숨 막히는 감옥과 고문현장을 오가며 여간수의 채찍과 조롱, 모욕을 온전히 감내해야 했던 김두석의 젊은 날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인생역정을 기록했다.
학창시절 김두석의 동료였던 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 영부인)는 “일제의 끈질긴 조롱과 모욕이 치욕스러웠지만 그래도 내 나라, 내 민족의 교도소에 있었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었다고 전한 바 있다. 암울한 시기, 신사참배를 당당히 거부하고 ‘옳고 정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한 김두석! 온건(穩健)한 나라사랑 정신이 역사의 한 자락에서 전진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준 그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