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미얀마의 영원한 독립영웅

아웅산

 세계 산책<BR />

글 김성원(부산외국어대학교 미얀마어과 교수)



아웅산은 영국 식민지배와 일제 침탈을 물리치고 미얀마의 독립을 이끌었지만 1947년 7월 19일 정치적 반대파의 저격으로 32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눈감는 순간까지 미얀마의 독립을 위해 고전한 그의 활약상과 투쟁정신은 오늘날까지 많은 이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alt

애국운동을 이끌던 당시 아웅산(1937)


불교 중심으로 전개한 민족주의운동

버마(1989년 미얀마로 개칭)는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영국은 분할통치를 통해 버마를 인도의 1개 주로 편입시켰고, 인도 출신과 소수민족 출신을 고용하여 버마인들을 억압하게 하였다. 이에 반발한 버마인들은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불교와 뗄 수 없는 역사와 문화를 가진 버마인들은 독립 및 민족주의운동 또한 불교를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1906년 결성된 불교청년회(Young Men’s Buddhist Association: YMBA)는 불교학교를 운영하여 불교적 덕목에 따른 도덕성을 강조하고 민족성을 일깨우는 작업을 시행하였다. 이들은 버마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비폭력투쟁에 나섰지만 이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냉랭하였다. 이후 1916년 영국인이 신발을 신은 채로 불교사원에 들어간 이른바 ‘신발착화사건’이 일어났다. 버마인들은 영국의 무엄한 태도에 강한 반발을 하였고, 이 사건은 버마의 민족의식과 애국운동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대학가로 번진 애국운동

1920년대 들어 애국운동은 대학가로 번졌고, 학생들은 학문의 자유와 대학정관 개정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지도자들은 ‘민족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민족교육에 힘썼다. 1930년대 들어 민족학교를 거쳐 양곤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버마의 전통의상을 입고 등교하고, 독립염원이 담긴 노래를 부르는 등 대대적인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양곤대학교 학생이었던 아웅산(AungSan)은 전면에 나서 학생들을 이끌었다. 아웅산은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인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이름 앞에 ‘주인’을 뜻하는 ‘따킨(Thakin)’이라는 단어를 붙여 불렀다.


alt

양곤대학교 총학생회 위원회,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아웅산(1936)(좌) / 런던 방문 당시 애틀리 수상과 아웅산(1947.1.)(우)

검은 속내를 감춘 일본과의 연합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웅산 일행은 이때를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이들은 당시 동남아에 세력을 넓히고 있던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일본은 검은 속내를 감추고 버마의 독립을 돕기로 약속하였다. 아웅산은 일본의 지원으로 ‘30인 지사’와 비밀리에 중국 하이난 섬으로 가서 버마독립군(Burmese Liberation Army)을 양성하였다. 이때 아웅산은 이름 앞에 호칭을 붙이는 버마의 관습에 따라 ‘장군’이란 뜻의 ‘보족(Bogyoke)’을 이름 앞에 붙였고, 이러한 이유로 현재까지 ‘아웅산 장군’이라 불리고 있다. 훈련을 마친 아웅산 일행은 1941년 일본군과 함께 버마로 들어왔다. 이들은 버마인들의 지지를 받아 수많은 신병을 확보하였고, 일본과 연합하여 영국에 대항하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결국 싱가포르 전선이 붕괴되자 영국군이 인도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전세가 우세해진 일본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내며 버마 지배를 노골화하였다.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은 버마 곳곳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였다. 현재 양곤 타욱짠국립묘지에 안장된 27,000여구 유해가 당시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일본은 버마 남부를 순식간에 장악하였고, 아웅산의 독립군도 즉시 해체시켰다. 이후 군사정부를 조직한 일본은 버마의 기성 정치인 바모 박사를 수장으로 내세워 버마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을 이끈 반파시스트인민자유동맹

일본의 처사에 분개한 아웅산은 1942년 5월 버마 북부에 있는 왕도 만달레이마저 일본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자 비밀리에 영국과 접촉하였다. 영국은 버마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였고, 아웅산은 그 즉시 10,000여 명의 군인을 모아 버마애국군(Patriotic Burmese Forces)을 결성하여 일본에 총구를 겨누었다. 이내 양곤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 아웅산은 버마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독립 실현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아웅산은 1944년 8월 항일정치단체 반파시스트인민자유동맹(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 이하 AFPFL라 칭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1945년 10월 영국은 전쟁파괴로 황폐해진 버마를 다시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태도에 반발한 AFPFL은 비협조운동을 선언하고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임시정부를 요구하였다. 이들은 영국의 노동당 정부와 교섭을 이어갔고, 1947년 1월 27일 런던에서 만난 애틀리 수상과 아웅산은 버마 독립에 관한 합의에 이르렀다.


목숨을 바쳐 이뤄낸 독립

한편 아웅산과 함께 런던으로 간 우소는 합의서 서명을 거부하였다. 식민정부에서 고위직을 맡았던 그는 영국 우익 정치가들과 연대하여 AFPFL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였다. 1947년 4월에 열린 버마 제헌의회 선거에서 아웅산이 이끈 AFPFL이 255석 중 248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다. 이후 6월 제헌의회가 출범하였고, 영국 총독의 협력하에 아웅산이 이끌던 집행위원회는 독립을 향한 실무 작업을 원활히 진행하였다. 하지만 선거 결과에 불만을 품은 우소는 저격병을 동원하여 7월 19일 회의장에서 아웅산을 살해하였다. 당시 아웅산의 나이 32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AFPFL은 독립 준비를 서둘렀다. 9월 버마 제헌의회는 만장일치로 새 헌법을 채택하였고, 아웅산의 동지였던 우누가 임시 대통령과 수상에 선출되었다. 11월 영국의회는 ‘버마독립법’을 통과시켰고, 1948년 1월 4일 마침내 버마족과 소수민족이 함께하는 독립공화국 버마연방(Union of Burma)이 탄생하였다. 오늘날 미얀마는 모든 종족을 아울러 하나의 국가로 만들기로 결의한 1948년 1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중심에는 아웅산이 있다. 영국의 식민지배와 일제 침탈을 물리친 활약상을 보여준 그는 미얀마의 독립영웅이자 국부(國父)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MAIN TOP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