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기

일제강제동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톺아보기<BR />

글 정혜경(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일제 침략전쟁에 희생된 수많은 조선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 군수공장, 탄광 등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원치 않은 총을 들어야 했고, 밤낮없이 고달픈 노역에 시달렸다. 가해자들은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묻으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료와 증언들이 피해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일제강제동원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alt

강제징용에 동원된 노무자들


일제강제동원의 개념

일제강제동원이란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태평양전쟁(1931~1945)을 벌이기 위해 실행한 인적·물적 동원을 말한다. 강제동원은 일본 본토와 남사할린, 식민지(조선, 타이완), 점령지(중국 관내, 중서부 태평양, 중국 동북부 지역인 만주, 동남아시아) 등 일제가 지배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행되었다. 본격적인 강제동원은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국가총동원법(법률 제55호, 1938년 4월 1일 제정)을 만들면서 자행되었다. 국가총동원법은 모든 지배지역에 있는 인력과 물자, 자금을 전쟁에 총동원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의회 동의 없이도 일제에 위임할 수 있도록 한 전시제 기본법이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모법(母法)으로 하여 국민징용령 등 각종 통제법령을 시행하였다. 


alt

조선총독부의 「징용자명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노무자

한국의 현행법(법률 제12132호.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서 규정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는 ‘군인과 군무원, 노무자, 위안부’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피해자는 노무자이다. 일제는 모집(1938.5~1945.6), 국민징용(1939.10~1945.6), 관알선(1942.2?1945.6)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동원하였다. 일제는 이를 ‘동원경로’라고 하였다. 동원경로는 일제 국가권력이 공권력으로 집행하였다. 노무자를 선정하는 일부터 기차와 배에 태워 보내기까지 모두 도·군·면의 직원(노무계와 면서기)과 이장, 경찰이 맡았다. 특히 노무자 인솔과 수송은 관할경찰서의 몫이었다. 1943년 3월 19일 일제 메이지광업(주) 소속 탄광으로 한인 105명을 보낸 책임자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경찰서장이었다. 피해자 가운데 노무자가 많았던 이유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만드는 등 민간인의 노동력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7,804,376명의 피해자

전시 강제동원은 몇몇 사람들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일본 국가권력이 정책적·조직적·집단적·폭력적·계획적으로 수행한 공식 업무였다. 그러므로 법과 제도에 따라 행정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동원하였다. 개인이 아니라 통치기관(일제 정부 기관, 조선총독부, 남양청 등)이 주관하였기에 식민지 및 점령지의 민중들은 거부할 수 없었다. 국가총동원법 제33조에는 ‘명령에 불복(不服) 또는 기피할 경우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원 이하의 벌금’ 규정도 있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 2015년 12월 폐지)가 산출한 인력 동원 피해 규모는 7,804,376명이다. 이 숫자는 중복해서 계산된 인원이 포함되어있다. 피해자 1인이 여러 차례 동원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제 동원인원은 약 2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저항에 나선 조선인들

일제의 강제동원에 조선인들이 순순히 응한 것만은 아니었다.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반대투쟁을 전개하였고,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탈출을 감행하였다. 또한 민족차별과 열악한 노동환경·노동조건하에서 파업, 태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쟁의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강제동원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강제동원 거부사건으로 ‘대왕산 죽창의거’를 들 수 있다. 1944년 7월 15일 안창률(安昌律)·김명돌(金命乭)·박재천(朴在千)을 포함한 청년 29명은 일제의 징병과 노역에 저항하기 위해 대왕산(大旺山)에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의하였다. 7월 25일 밤 29명 전원은 대왕산 진지에 모여 의거대를 조직하여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이후 그들을 잡으러 온 일제 경찰을 죽창(竹槍)과 투석(投石)으로 맞서 물리쳤다. 그러나 8월 10일경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가 모두 체포되고 말았고, 이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alt

김명돌(좌) / 박재천(우)

강제성 부정을 고수하는 일본

“… 1940년대 일부 지역에서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가혹한 조건하에서 일하도록 강요당한 많은 한국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 정부 또한 요구 정책을 시행했다. …”

2015년 7월 5일, 독일에서 열린 제39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사토 구니(佐藤地) 주 유네스코 일본대사의 공식 발언이다. 이 발언은 일본 최초로 국제기구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의 강제동원을 공식 인정한 사례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 발언 직후부터 줄곧 철저하게 ‘강제성 부정’을 고수하고 있다. 사토 구니 대사의 발언 직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현재 총리)은 기자들에게 ‘강제가 아니라 일하게 되었다‘는 자발적 노동 의미로 번역하였다. 취업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 같은 입장은 현재까지 이어져 유네스코 세계위원회 권고에 따라 2020년 6월 일본이 도쿄에 설치한 일본산업유산정보센터는 역사 왜곡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국제적으로 입증된 위법성

이러한 역사 왜곡과 부정은 일본 정부 입장에 국한하지 않는다. 2019년에 국내 출간한 『반일종족주의』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입을 모아 한인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대로 한인 강제동원은 강제가 아니었는가.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법이 강제였다고 입증하고 있다. 1997년과 2002년에 일본변호사연합회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이 자행한 한인에 대한 전시노무동원이 국제법과 국제노동기구(ILO)의 규약을 위반했으므로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근거는 세 가지였다. 첫째,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 위반(ILO 제29호 조약), 둘째, 노예조약 및 국제관습법으로서 노예제의 금지 위반(국제연맹 규약 제22조 5항), 셋째, 인도에 대한 죄에 위반하는 행위(뉘른베르크(Nuremberg) 국제군사재판소 조례 및 극동군사재판소 조례에서 처음 실정화된 전쟁범죄)였다.        

1919년에 창설된 국제노동기구(ILO)는 1930년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일명 강제노동협약)(29호)을 채택하였고, 1932년 일제는 강제노동협약을 비준하였다. 이 협약에 따르면, 일제는 제1조 제1항에 따라 ‘가능한 한 조속히 모든 형태의 강제 또는 의무 노동 사용을 억제할’ 법적 의무를 져야 했다. 그 외 제13조, 제14조 제1항과 3항, 제15조 제1항, 제17조, 제21조, 제25조 규정도 있다. 일제의 한인 강제동원은 강제노동협약의 규정을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위반한 행위였다.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강제노동협약 제2조 제2항(전쟁, 지진, 화재 등 긴급한 경우는 제외)을 들어 합법적이었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ILO는 1997년에 조약(협약) 및 권고 적용 전문가위원회(CEACR)에서 일본은 제2조 제2항을 위반했다고 결정하였다. 이 조항은 ‘돌발적 우발적이어서 즉시 대응조치를 할 수 없는 경우를 의미’하는데, 일본의 침략전쟁은 돌발적이거나 우발적이 아니라 계획적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ILO의 CEACR는 1999년 제87차 ILO 총회(ILC)에서 일본 당국의 전시노무동원에 관한 소견을 공표하였다. “이같이 개탄스러운 조건으로 일본의 사부문 산업에서 일할 노동자를 대량 징용한 것은 강제노동협약 위반”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같이 일제의 한인 전시노무노동의 위법성은 국제법과 국제기구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강제성 부정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MAIN TOP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