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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아이들, 그 참혹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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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혜경(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강제동원의 피해는 어른들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일제는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탄광, 공장 등으로 끌고갔다. 반인권적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약한 몸으로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끝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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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에 동원된 소녀들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착취

일제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다양하고 방대한 규모의 물자를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아갔다. 미곡부터 광물·목재·소금에 이르렀다. 한반도 전역에서 숟가락과 놋그릇을 징발해 인천 부평의 육군조병창 주물공장에서 녹여서 무기도 만들었다. 그런데 공출은 물자만이 아니었다. 물자와 함께 사람도 공출(供出)하였다. 많은 한인이 노역에 시달렸다. 주로 장정들을 동원했으나 노인과 아이들, 여성들도 있었다. 

이 가운데 어린이 사례를 살펴보자. 당국은 일본, 남사할린, 중서부태평양, 한반도의 탄광과 광산, 군수공장, 토목건축공사장, 집단농장으로 어린이들을 내몰았다. 그렇다면 몇 살부터 어린이로 보아야 할까. 사전을 보면, 아동은 ‘보통 만 6세 이상 13세 미만’이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서 아동은 ‘만 14세 미만’이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이다. 일제는 이들을 강제로 동원하기 위해 법을 만들었는데, 법에는 동원 나이(모두 만 나이)가 적혀 있다. 각종 규정을 보면, 시기가 지나면서 점점 동원 나이가 어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규정대로 동원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는 더 어린아이들을 동원하였다. 동원 실적을 위해 법을 위반한 것이다.* 동원 방식도 다양하였다. 이장이나 면서기가 동원하기도 하였고, 교사가 회유하기도 하였으며, 길거리 납치도 서슴치 않았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일제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동원했는지 파악할 수 없다. 정부에 신고한 피해자 사례만 알 수 있을 뿐이다. 


* 일제가 어린이를 강제로 동원하기 위해 만든 각종 규정

1 국민근로보국대 실시요강(1938년 6월) : 20세~40세 남녀

2 국민근로보국협력령(1941년 11월) : 14세 이상~40세 미만 남성, 14세 이상~25세 미만 여성

3 노무조정령(1941년 12월) : 14세 이상~40세 미만 남성, 14세 이상~25세 미만 여성 

4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개정(1944년 11월) : 14세 이상~60세 미만 남성, 14세 이상~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

5 여자정신근로령(1944년 8월) : 12세 이상~40세 미만 여성

6 국민근로동원령(1945년 4월) : 12세 이상~60세 미만 남성, 만 12세 이상~만 40세 미만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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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만 14세 이상 20세 이하의 청소년들을 동원한다는 내용의 기사, 『매일신보』(1941.5.2)(좌) / 조선여자근로정신대원들(1945. 10.19)

극심한 공포감에 시달린 소녀들

일제는 여성노무동원의 법적근거를 명확히 하고 동원연령 확대와 강제력 강화를 위해 1944년 8월 23일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하였다. 이 규정에 의한 조선총독부의 ‘알선지도’에 따라 10대 초·중반 여학생들이 교장과 담임교사의 지원종용과 감언이설에 속아 강제동원 되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1944년 4월경부터 조선이나 일본, 만주 등의 공장으로 동원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원지로 후지코시강제공업(주) 도야마공장, 미쓰비시중공업(주)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도쿄아시아토방적(주) 누마즈공장 등이 있다. 12~16세 어린 소녀를 동원하여 군대식 노동규율과 장시간 노동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소녀들은 크고 작은 노동재해는 물론, 지진과 공습으로 인한 극심한 공포감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끝내 탈출을 감행하다 붙잡힌 소녀들에겐 가혹한 폭력이 가해졌다. 발가벗겨 기숙사마다 데리고 다니며 망신을 주고, 감독들이 집단 성폭행한 뒤 공창에 팔아넘기는 사례도 있었다.


강제노역에 동원된 아이들의 증언

야나기모토 비행장 건설 공사장에는 열세 살 소녀 정자가 있었다. 1931년 8월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정자는 세 살 때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해 나라현 야마베군에 있는 학교에 다니다가 1944년 7월 근로보국대로 끌려갔다. 비행장에서 모래를 이고 자루에 담거나, 흙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 여름 내내 힘든 일을 하는 딸이 안쓰러운 아버지는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될 것 아니냐”며 학교를 중퇴하도록 했다. 그런데 일제는 며칠 후 이번에는 정신대로 시즈오카조선소에 가라고 통보하였다. 아버지는 “시즈오카가 너무 멀다”며 손을 써서 오사카에 있는 비행기부품공장으로 가도록 하였다. 하루 12시간씩 하는 공장일은 힘들고 위험하였다. 공장에서 정자는 기계에 넘어져 얼굴에 흉터가 남고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전쟁은 소녀에게 장애를 남겼다.

한편 1924년 4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소년 봉제는 1940년 10월 오사카에 있는 해군시설부 직속 도크공사장과 나라현 덴리시에 있는 해군 야나기모토 비행장 건설 공사장에 끌려갔다. 만 열네 살 때였다. 어린 나이에 해군공사장으로 가게 된 이유는 읍에 나갔다가 중앙시장 부근에서 붙잡혔기 때문이다. 소년은 순사에게 잡힌 후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해동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일본으로 떠났다. ‘중앙로 1가, 지금 강원은행 지점 옆’, 70년이 되도록 잊을 수 없는 해동여관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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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 제조공장에 동원된 소녀들(좌) /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동원된 소녀들(우)

창살 없는 감옥, 하시마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하나인 군함도라고 불리는 하시마도 조선의 아이들을 동원한 노역장이었다. 일본의 우익과 한국의 역사부정론자(『반일종족주의』 필자들)는 지금도 “하시마에 소년 광부는 없었다”며 세계 시민들에게 거짓을 유포하고 있다. 그러나 소년 탄부는 존재하였다. 1929년 11월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최장섭은 1943년 하시마에 끌려갔다. 3남 5녀의 식구들은 가난했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불행이 닥친 것은 큰형이 당국의 동원에 응하지 않고 몸을 숨겨 반역자 집안이 되면서 부터다. 면 노무계인 윤가는 1943년 1월 28일 엄동설한에, 열세 살 소년을 데리고 익산군청으로 갔다. 장섭을 본 군수가 “왜 많은 사람 가운데 어린애를 보내려느냐”고 하자, 윤가는 “형이 동원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대신 일본에 충성을 다하고자 보내는 것”이라 하였다. 장섭은 하시마에 도착해 파도가 방파제 주변 옹벽에 부딪치는 것을 보고 ‘저기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생각하였다. 해저 천 미터 이상 내려가는 갱 안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도착한 다음날 오후부터 소년은 2년 5개월간 탄부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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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라 불리는 하시마(좌) / 세상으로 통하는 창구, 하시마(2017.11.촬영)_ 역사문화콘텐츠 공간 제공(우)

사망원인도 알 수 없는 어린이 사망자

각종 노역장에서 어린이 사망자는 속출하였다. 탄광산과 토목건축공사장이 가장 심했다. 1931년 2월 경북 영양군에서 태어난 세창은 1943년 7월 중천가곡광산에 동원되었다. 겨우 열한 살밖에 되지 않았던 소년은 광산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갱이 무너지면서 기계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절망한 부모는 사망신고도 하지 않았다. 부모보다 일찍 세상을 뜬 자식은 불효자 중에 가장 큰 불효자인데, 부모보다 먼저 사망신고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일본 당국은 조선의 아이들을 강제노역장으로 동원했다. 그렇다면 일본 아이들도 동원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당국이 법 규정을 어겨가며 동원한 것은 조선의 아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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