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여성·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

박원희와 김사국

 아름다운 인연<BR />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박원희와 김사국은 부부이자 사상적 동지였다.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이 곧 조국광복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라 믿은 두 사람은 생을 다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노동자·농민·청년·여성 등 기층민중을 위한 민족교육과 사회주의운동의 통일·단결에 노력을 기울였다.


alt

박원희와 김사국


민족독립 방안을 모색하다

김사국(金思國)은 1892년 11월 9일 충남 연산(현 논산시) 출신으로 아버지 김경수(金慶秀)와 어머니 순흥 안씨 안국당(安國堂)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 호는 해광(解光)이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13세 때 어머니와 동생 김사민(金思民)과 함께 외가로 생활근거지를 옮겼고,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한학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07년 공부를 위해 경성(현 서울)으로 간 그는 보성학교(현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마친 뒤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피혁회사에 다니며 고학을 이어갔고, 그해 4월 한국유학생들의 연합단체인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 가입하고 기관지 『대한흥학보』 출판부원으로 활동하였다. 한일병합이 선포된 뒤 귀국한 사국은 한성중학교에 입학하여 학문을 이어갔다. 이후 1918년 6월 남만주 철령·개원과 연해주 등지를 돌며 문창범·윤해·이동휘 등과 교류하며 민족독립 방안을 모색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전 경성으로 돌아온 사국은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조선국민대회’를 주도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 징역형을 살았다. 1920년 9월 6일 출옥 후 동생 김사민이 간사로 활동하던 조선노동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국은 조선청년회연합회 기관지 『아성(我聲)』에 신사조 관련 글을 여러 편 기고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 식민지 노예교육에 맞서 조직된 조선교육개선회 위원이 된 사국은 조선불교청년회를 비롯하여 각 지역 청년회와 조선노동대회 등의 초청으로 강연활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부부가 되어 사회주의운동을 실천하다

1921년 7월 사국은 여성 사회주의운동가 박원희(朴元熙, 본명 박연희)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우리는 굳센 용사가 되어 잘못된 사회를 바로 잡을 세다.”라는 맹세를 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사국은 『5·1신보』 발기에 참여하였고, 더불어 미나미센주(南千住) 교외에서 김사민·박상훈·임봉순·정남태 등과 사회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도쿄 중앙청년회관에서 반도고학생 친목회 주최로 「현대적 경제조직의 결함」을 강연하고 흑도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사국은 무산자동지회와 김약수 등 12인과 ‘동우회선언’을 발표하였다. 이후 귀국한 사국은 잡지 『학생계』 속간 기념강연회에서 「학생에게 소(訴)하노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쳤고, 인쇄직공친목회 주최 강연회에서 「노동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노동운동이 지닌 의미를 강조하였다. 또한 1922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사건’에 관련된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 간부이자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청년회연합회 간부인 최팔용·오상근·장덕수 등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으나 거부당하였다. 이에 서울청년회를 이끌고 조선청년회연합회를 탈퇴하였고, 그해 6월 서울청년회 임시총회에서 장덕수·김명식 등 상해파 고려공산당 당원 5인을 제명하였다.        

1922년 8월 사국은 ‘니가타현 조선인학살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어 천도교회관에서 진상조사를 보고하였다. 조선노동대회 주최 강연회에서 「민족적 단결과 계급적 단결」을 주제로 강연하다가 일경에 의해 중지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영·김영만·임봉순 등 15명과 함께 서울청년회 내부 ‘공산주의그룹’을 창립하고 이어 자유노동조합 발기총회에 참가하였다. 사국은 ‘신생활사 필화사건’이 발생하자 만주로 활동근거지를 옮겼다. 고려공산동맹의 승인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의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원동부에 파견되어 이젤손 등을 만났으나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23년 3월 김정기·방한민 등과 함께 북간도(北間島) 룽징(龍井)에 사회주의 교육기관인 동양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8월 일제의 ‘동양학원탄압사건’으로 중국 관헌에 의해 50여 명의 학생이 체포되면서 동양학원은 폐교당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은 사국은 영고탑(寧古塔)으로 가서 대동학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주의 선전과 교육운동에 종사하였다. 


사회주의운동의 선구자, 숨을 거두다

1924년 5월 폐결핵이 걸린 몸으로 귀국한 사국은 통일된 조선공산당 조직을 위한 ‘13인회’ 결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어 북풍회·화요회·신흥청년동맹을 방문하여 ‘전조선사회주의운동자대회’의 개최를 제창하였다. 1924년 12월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1925년 4월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 등으로 활동을 이어갔으나 폐결핵이 악화되어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국은 1926년 5월 8일 종로구 가회동 북악청년회관에서 35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우회·전진회·조선노동당·조선청년총동맹·조선형평사 등 40여 단체의 조선사회운동단체연합 장의위원회가 만들어져 사회운동연합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졌다. 사국의 시신은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현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 수철리공동묘지에 묻혔으나 이후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어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사국의 유해는 망우리공동묘지를 떠나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alt

「김사국씨 영면」, 『동아일보』(1926.5.10.)

여성운동의 선구자, 눈을 감다

여성운동의 선구자, 눈을 감다 원희는 사국의 사후에도 활동을 굳세게 이어나갔지만 병고로 인하여 1928년 1월 5일 홀연히 눈을 감았다. 사국이 세상을 떠난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유일한 혈육인 네 살배기 딸 사건을 홀로 남겨두고 30세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일들 잘 보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이 못다 이룬 여성해방·민족해방의 꿈을 동지들이 이어가길 바란 것이다. 1928년 1월 10일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34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거행되어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장례식에는 1,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하였고, 영구에는 ‘조선 여성운동 선구자’라는 명정이 덮어졌다.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원희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열사묘에 사국의 유해와 함께 합장되었다.


alt

여성교육 필요성에 관한 박원희의 기고글,『동아일보』(1927.6.1.)


여성운동의 선구자, 눈을 감다

여성운동의 선구자, 눈을 감다 원희는 사국의 사후에도 활동을 굳세게 이어나갔지만 병고로 인하여 1928년 1월 5일 홀연히 눈을 감았다. 사국이 세상을 떠난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유일한 혈육인 네 살배기 딸 사건을 홀로 남겨두고 30세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일들 잘 보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이 못다 이룬 여성해방·민족해방의 꿈을 동지들이 이어가길 바란 것이다. 1928년 1월 10일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34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거행되어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장례식에는 1,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하였고, 영구에는 ‘조선 여성운동 선구자’라는 명정이 덮어졌다.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원희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열사묘에 사국의 유해와 함께 합장되었다.


MAIN TOP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