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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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구병(아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18세기 말 페루와 아이티의 선례에 이어 19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라틴아메리카 여러 지역의 독립투쟁은 지배 세력인 페닌술라르에 대한 크리오요의 도전이었다. 대부분 신생 공화국의 수립으로 이어진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은 18세기 말 미국의 독립혁명이나 19세기 초 유럽의 자유주의 혁명과 유사한 궤적의 변혁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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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미겔 이달고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의 원인

라틴아메리카는 다른 제3세계 지역에 비해 식민화뿐 아니라 탈식민화의 시기가 무척 일렀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된 공동체』에서 적절히 정리한 대로, 19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라틴아메리카 여러 지역의 독립투쟁은 ‘크리오요(criollo, 아메리카 태생의 백인) 민족주의’의 표명이었다. 3세기에 걸친 식민 시대에 아메리카에서는 페닌술라르(peninsular, 이베리아 반도 출신의 백인)와 크리오요 사이의 구분이 점차 뚜렷해졌다. 1570년 무렵 페닌술라르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거주하던 약 12만 명의 백인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19세기 초에는 약 320만 명에 이르는 백인 중 15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페닌술라르가 식민지 정부와 군대, 교회의 요직을 독점한 반면, 부왕(식민지의 최고 행정 책임자)으로 임명된 약 170명 중 크리오요는 4명뿐이었고 전체 주교들의 15퍼센트 정도였다. 이런 크리오요의 배제나 식민 권력의 비대칭적 배분이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독립투쟁의 주된 원인이었다.


무시당하고 잊힌 아이티의 흑인 봉기

사실 원주민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780~1783년 페루 부왕령에서 원주민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투팍 아마루 2세)가 마지막 잉카 투팍 아마루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약 8만 명의 추종자들을 모았지만, 그 저항은 크리오요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식민 당국에 의해 진압되었다. 한편 1791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생도맹그(현재 아이티)에서 일어난 흑인 혁명은 크리오요의 지지가 없었음에도 아메리카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의 위업을 달성했다. 사탕수수 재배의 중심지이자 프랑스의 금고로 간주된 생도맹그에서 노예 출신의 흑인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가 프랑스 혁명과 유럽의 전쟁을 틈타 독립투쟁을 이끌었을 때, 다른 지역의 크리오요들은 이를 과격한 흑인 폭동으로 치부했다. 그리하여 1804년 아이티라는 이름의 새로운 독립 국가가 선포되었지만, 오랫동안 외교적 승인 없이 그 존재는 무시당했다. 

생도맹그의 흑인 봉기나 프랑스 혁명의 급진화가 크리오요 독립투사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면, 미국 혁명은 저항의 지도자들이 적절하게 통제한 모범적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누에바 에스파냐(현재 멕시코)와 페루뿐 아니라 노예제 문제가 심각했던 누에바 그라나다(현재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크리오요 유력자들은 독립투쟁이 정치적 차원을 넘어 과격한 사회적 소요와 인종적 대립으로 확산될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에 원주민이나 유색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담스러워했다. 특히 페루의 크리오요들은 식민 시대의 막바지 단계까지 그런 도전에 직면하기보다 질서와 위계서열을 보증하는 에스파냐 식민 당국의 지배를 감수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페닌술라르에 맞서는 크리오요의 독립투쟁은 점차 유색인들이 에스파냐인들의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780년대 페루와 1790년대  생도맹그처럼 아래로부터의 봉기가 재현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누에바 그라나다의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1799년에 독립투쟁의 전략을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 앞에는 미국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이제 첫 번째를 신중하게 모방하고, 조심스럽게 두 번째를 피해 가자.” 하지만 미란다의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누에바 그라나다는 1810년부터 10년 넘게 엄청난 유혈 충돌에 휩싸였다.


크리오요 주도의 보수적 독립투쟁

누에바 에스파냐의 사례 또한 이런 전반적인 흐름을 잘 보여주었다. 1810년 9월 16일 ‘돌로레스의 함성’을 이끈 크리오요 사제 미겔 이달고는 에스파냐인들의 재산 몰수와 원주민 공납 폐지를 요구했다. 오늘날까지 멕시코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갈색 피부의 과달루페 성모상을 앞세우고 독립투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이달고의 봉기는 1811년 3월 그의 처형으로 막을 내렸고 적지 않은 원주민 지지자들이 흩어졌다. 곧 메스티소(혼혈인) 사제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등장해 식민 당국에 대한 항거를 이어갔지만, 그 역시 크리오요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1815년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렇게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좌절되고 몇 해 동안 식민 당국의 반(反)혁명이 지속된 뒤 독립투쟁의 주도권은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에게 넘어갔다. 원래 크리오요 출신 군 장교로서 이달고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가담했던 이투르비데는 식민 당국의 약화를 틈타 식민지 민병대를 지휘하고 1821년 2월 왕정의 수립, 가톨릭의 국교 지정, 에스파냐인과 아메리카인의 동등한 대우를 내세우면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 과정과 요구 사항은 이달고와 모렐로스의 독립투쟁에 비해 온건하고 제한적이었지만, 독립 후 새로운 정치 체제의 수립을 둘러싸고 크리오요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1822년 아구스틴 1세로 즉위한 이투르비데는 공화정 지지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이듬해 폐위되고 처형당했다. 공화정 지지자들은 미국 헌법과 에스파냐의 1812년 자유주의적 헌법을 참고해 1824년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고 연방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정치적 분리를 이뤄낸 각 지역의 독립투쟁은 경제적 기반을 뒤흔들 만큼 엄청난 손실과 희생을 초래했다. 광산과 대농장들의 생산량은 독립투쟁 이전과 비교할 때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에스파냐의 통치 역량과 인적·물적 자원이 집중되어 있던 누에바 에스파냐의 독립투쟁은 원주민들의 저항에서 비롯되어 10년 동안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60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미국의 경우 1789년 연방 공화국의 출범 이후 20여 년 동안 유럽의 전쟁과 그에 따른 자국 생산품의 수요 증대에 힘입어 경제적 이득을 누릴 수 있었지만, 유럽이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든 1820년대에 독립하게 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로서는 그와 유사한 기회를 포착할 수 없었다. 더욱이 원주민이나 유색인(메스티소, 흑인 노예와 자유민)들을 배제한 채 크리오요 유력자들이 주도한 라틴아메리카의 탈식민화는 국가의 독립이라기보다 걸출한 개인과 집단의 독립처럼 여겨졌다. 공식적인 독립 이후에도 19세기 말까지 여러 지역에서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크리오요 사이에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이런 갈등이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개입을 유발하는 동안 식민 시대와 다를 바 없이 군대, 교회, 대농장 체제라는 권력의 기반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원주민이나 유색인들에게 독립 후 체제는 ‘새로운 노새에 올라탄 똑같은 기수’처럼 보일 뿐이었다. 

결국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의 특성은 보수적 성향의 크리오요 민족주의의 표명과 원주민이나 유색인들의 배제로 요약할 수 있다. 아울러 18세기 말~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의 배경과 전개 양상을 대서양 세계의 혁명과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 사실 라틴아메리카 여러 지역의 독립투쟁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베리아 반도 침입이 촉발한 에스파냐의 정치적 위기와 맞물려 있었다. 대부분 신생 공화국의 수립으로 이어진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은 18세기 말 미국의 독립 혁명이나 19세기 초 유럽의 자유주의 혁명과 유사한 궤적의 변혁 운동이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은 대서양 양안의 연계와 동조(同調)의 역사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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