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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충무공의 어색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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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도진순(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누군가를 기린다는 것, 무엇을 기념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기억하는 주체들의 수준과 함량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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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친필 충무공 이순신 시비 전면(창원시 진해 남원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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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공 이순신 시비 후면의 비명


바다와 산에 맹세하노니

경남 창원시 진해의 남원로터리에는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라는 김구의 친필로 된 ‘충무공 이순신 시비’가 있다. 바다와 산 그리고 대자연과 소통하면서 맹세하고 다짐하는 이 웅혼한 구절은 충무공 이순신의 유명한 시구(詩句)이다. 


(서해어룡동: 誓海魚龍動) 바다에 다짐하니 어룡이 움직이고

(맹산초목지: 盟山草木知)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더라.


김구는 항일독립운동의 전선에서, 해방 이후 험난한 정국에서 이 구절을 애송하면서 자주 휘호로 남겼다. 특히 1936년 8월 27일 자신의 회갑일에 이 시구를 쓴 휘호가 세 건이나 남아 있다. 당시 김구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의 여자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와 함께 난징(南京)의 회청교(淮淸橋) 부근에 숨어 살면서, 장제스(將介石)를 만나 독립운동의 용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 잠룡(潛龍)의 둥지에서 자신의 회갑을 맞이하여 쓴 휘호가 바로 ‘서해맹산’ 휘호였다. 그것도 3건이나.     

1945년 환국 이후에도 김구는 여러 번 충무공의 ‘서해맹산’을 휘호로 남겼다. 간략하게 조사한 바에 의하면 김구가 쓴 이 휘호는 14건이나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돌에 새진 비로는 진해 남원로터리 것이 유일하니 귀중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된 오류, 1946년과 1947년

창원시에서는 2017년 남원로터리의 이 시비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안내판도 대리석으로 새롭게 마련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전과 그대로이다. 그런데 유감천만으로 안내판은 처음(①)과 끝(②)이 맞지 않다.   


① 이 시비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진해를 방문하여 해안경비대 장병들을 격려하고 조국 광복을 기뻐하면서 남긴 친필 시를 화강암에 새겨 만든 비석이다.(중략)

② 비석 측면에는 ‘大韓民國二十九年八月十五日(1947년 8월 15일) 金九謹題’라고 음각되어 있다.


안내판의 처음에는 김구가 1946년 진해를 방문했을 때 남긴 친필 시를 새긴 것이라 하였지만, 마지막에서는 비석 측면에 1947년 8월 15일 쓴 것이라고 김구 친필로 새겨져 있다고 소개하였다. 즉 비석에 김구의 친필로 1947년 8월 15일에 쓴 것이라 새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내판에는 1946년에 써 준 것이라 우기면서 안내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오류는 예전의 안내판도 그러하였으니, 수십 년간 교정되지 않고 있다. 이런 억지는 어떤 내용의 휘호를 한 번만 쓰는 것처럼 생각하는 무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던 내용을 여러 번 휘호로 쓸 수 있고, 김구 역시 그러했다. 1946년 9월 15일 김구가 진해를 방문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당시 이 시구를 휘호로 써서 사람들에게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과 별개로 이 시비는 1947년 8월 15일에 쓴 것이라고 비석 측면에 김구 친필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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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친필 충무공 이순신 시비에서 훼손된 부분


선양하는 비명과 깨진 비신

진해 남원로터리의 안내판에서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은 시비의 이름이다. 이전의 안내판도, 2017년 새로 만든 안내석도 시비의 이름이 ‘백범 김구 친필 시비’이다. 2017년 정비하면서 아예 ‘백범 김구 선생 친필 시비’라고 크게 강조하여 비의 뒷면에 붙여 놓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비의 이름에서 핵심은 충무공 이순신의 시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핵심인 충무공은 유실되고, ‘백범 김구 친필’만 강조되어 마치 김구의 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식의 작명이면, 바로 옆 진해 북원로터리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는 앞면에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상(李舜臣像)’ 7자가 있으니 ‘충무공 동상’이라 하지 않고 ‘이승만 친필 동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통해서 이승만이나 김구가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쓴 김구만 제목에 부상시켜 당파적 싸움을 자초할 수 있다.       

사실 이 시비는 이승만과 김구를 빙자한 당파 싸움으로 심각하게 훼손된  상처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현재 세워진 비는 깨어진 원 비석 2조각과 시멘트로 보완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맹세할 서(誓)’ 자 부분은 돌이 깨어졌지만 원글자이고, 시멘트로 보완한 ‘바다 해(海)’ 자의 물수변은 원글자의 획이 아니다. 그 전말을 정리하면, ① 김구가 1947년 8월 15일 써 준 이 시비는 원래 현재의 남원로터리가 아니라 북원로터리 광장에 세워졌다. ② 1949년 6월 26일 백범 암살 이후 이승만에 충성스러운 어떤 해군 장성이 북원 광장에서 시비를 뽑아서 진해역 근방에 버렸다고 한다. 이때 비가 파손되었고, 진해역 창고에 보관되었다. ③ 1952년 4월 13일, 북원로터리에서 충무공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의 전면에는 ‘이승만(李承晩) 근서(謹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상(李舜臣像)’이 새겨졌다. ④ 1960년 4·19 또는 5·16 이후 깨어진 충무공 시비가 수습되어 현재의 남원로터리로 옮겨져 세워졌다. 이때 깨어진 조각을 붙이고, 없는 부분은 시멘트로 보완하였다. 반면 북원로터리의 이순신 동상 전면의 글씨 중에서 ‘이승만(李承晩) 근서(謹書)’ 5자는 제거되었다.

그러니까 이 시비에서 깨진 ‘誓海’ 부분은, 충무공 이순신이 유실되고 이승만과 김구로 대표되는 역사 기억의 충돌을 볼 수 있는 귀중하고도 슬픈 자화상이다. 2017년 남원로터리의 시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충무공은 유실되고 ‘백범 김구 친필 시비’라는 이름표를 붙인 것 역시 깨어진 상처와 같이 슬픈 자화상이다. 훼손시키며 깨어진 상처나 선양하면서 붙인 비명이나 편향적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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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친필 유묵 '붕정만리'(1947. 元旦:음 1. 1.)(좌) / 진해 남원로터리의 백범 친필 ‘붕정만리’(우)


붕정만리(鵬程萬里)와 독립정신(獨立萬歲)

2017년 창원시에서 〈백범 친필 시비〉를 정비하면서 까만 오석에 〈백범 김구 연보〉와 〈어록〉, 그리고 김구 친필의 다른 휘호를 새겨 시비 주변에 배치하였다. 〈연보〉와 〈어록〉에도 여러 문제가 있지만, 지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김구의 친필 휘호 〈독립만세(獨立萬歲)〉와 〈붕정만리(鵬程萬里)〉만 언급하고자 한다.     

왜 하필이면 〈독립만세〉와 〈붕정만리〉를 선택하였을까? 유추컨대, 김구 하면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의 상징이니 〈독립만세〉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으니 〈붕정만리〉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붕정만리〉의 원본을 추적하면 김구가 1947년 원단(元旦), 즉 음력 1월 1일, 양력 1월 22일에 쓴 것이다. 당시 김구는 이승만과 긴밀한 반탁 연대로 정부수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승만이 도미 외교를 통해서 정부 수립을, 김구는 국내에서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6년 11월 30일 창덕궁 인정전에서는 각계각층의 유지들이 모인 이승만 환송회가 개최되었으며, ‘백발노구로 만리붕정으로 도미하게 된 이승만의 장거’를 기원하는 성명서도 발표되었다.      

이와 같이 당시 우파에서는 이승만의 도미 원정을 ‘붕정만리’라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김구의 〈붕정만리〉 휘호는 이승만과의 반탁 연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보적 의의가 있다. 이승만은 중국을 경유하여 1947년 4월 21일 김포공항으로 귀국하는데, 당시 김구는 ‘이박사환국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남원로터리에 새겨진 〈독립만세〉의 원본을 추적해보면 1947년 6월 23일 쓴 것이다. 이날은 단오절이자 미소공동위원회 참여 단체의 등록 마감일이었으며,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선수가 귀국하는 날이었다. 이승만과 김구가 연대한 반탁 진영은 서윤복 선수 환영 국민대회를 이용하여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니, 이날에 쓴 〈독립정신〉의 ‘독립’은 일제로부터 독립이 아니라 반탁·반소·반좌파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1947년 전반기 김구의 〈붕정만리〉와 〈독립정신〉은 이승만과의 반탁 연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묵이다. 김구의 많은 유묵 중에서 이 두 유묵을 선택하여 돌에 새긴 것은 과연 적절한 것인가? 시비 제목에서는 김구만 강조하더니, 시비를 호위하는 김구의 다른 휘호는 하필이면 이승만과 연대의 상징이라 덧칠한 화장같이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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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남원로터리의 백범 친필 ‘독립만세’(좌) / 백범 친필 유묵 '독립만세'(1947. 6. 23.)(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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