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연해주 한인사회를 이끌며 

독립의 역량을 모으다

이달의 독립운동가<BR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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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회 임원록(1911. 12. 19.)(좌) / 「신한촌 전경」, 『권업신문』(1914)(우)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조직되다

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0년대 한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연해주 전 지역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소식이 전해지자 재러 한인들은 성명회를 조직하여 강제병탄의 부당함과 독립 의지를 알렸고, 성명회 해산 후에는 조국 독립의 장기적인 방략 모색을 위해 1911년 12월 권업회를 조직하였다. 권업회는 한인의 권익 보호와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선 연해주 한인사회의 대표기관이었다. 


권업회 부의장 이종호, 권업회 재정을 후원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  

1907년 사립 보성학교 경영 등을 통한 인재 양성에 힘쓰며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이종호는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와 1911년 권업회 의사부 부의장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권업회 운영 및 『권업신문』 발간에 필요한 비용 대부분을 기부하는 등 권업회의 중요한 재정적 후원자였다. 1914년 권업회가 해산되자 중국 왕칭현으로 이동하여 대전학교를 건립하는 등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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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권업신문』 (1912. 5.), 성명회 취지서(1910. 8. 23.), 『해조신문』 창간호(1908. 2. 26.)


권업회 총재 김학만, 연해주 한인사회 발전에 힘쓰다

19세기 초기 러시아로 이주하여 정착한 김학만은 1907년부터 계동학교, 명동학교 등 한인학교 설립과 운영을 적극 후원하는 등 이주 한인의 권익 신장에 힘썼다. 1910년 한인거류민회 회장으로 당선되었고 일제의 강제병탄에 맞서 성명회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하여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1911년에는 권업회 총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위한 한흥동 건설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권업회 해산 후에는 1919년 대한노인동맹단원으로 활약하는 등 조국 독립에 앞장섰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2012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업회 총재 최봉준, 재러한인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다

초기에 러시아로 이주하여 군납업 등으로 자본을 모은 최봉준은 러시아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08년 러시아 최초 한글신문인 『해조신문』을 창간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며 연해주 한인학교 후원에도 힘을 쏟았다. 1911년 권업회에서 총재가 된 그는 『권업신문』 간행을 지원하고, 연추 지방지회에서 의사원으로 활약하였다. 권업회 해산 후에는 1917년 고려족중앙총회 기관지인 「청구신보」 창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96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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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준 소유의 ‘준창호’


우리가 이미 부모지국을 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머물러 산 즉, 

우리에게 있는 권리를 보전하고 

우리가 행할 의무를 더욱 힘쓰면 

우리의 사업이 날로 흥왕하고

일제 수탈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최봉준의 『해조신문』 발간사 중(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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