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기

김구, 

거북이 되어 연꽃 아래 잠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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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도진순(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명전자성(名詮自性)’이란 말이 있다. 이름에 본성과 실상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한국인 누구에게나 익숙한 명호(名號)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1914년(39세) 감옥에서 석방 이후 새로운 활동을 대비해서 지은 최종 명호이다. 그의 이전 이름은 김구(金龜), 즉 거북이었다. 이 이름의 사연에 대해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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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김구


심산유곡의 성태영가에서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며

백범의 파란만장한 삶을 대변하듯 그에게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1876년 태어난 이후 아명은 김창암(金昌巖), 1893년(18세) 동학에 입도 이후 김창수(金昌洙), 치하포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898년(23세) 탈옥한 이후 삼남에 잠적하면서 사용한 가명 김두호(金斗昊),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며 얻은 법명 원종(圓宗) 등이 있다.       

1900년(25세) 환속한 김창수는 무주와 김천의 심산유곡에서 특이한 산중 생활을 하게 된다. 그가 무주·김천에 이르는 과정은 『백범일지』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 중 하나이다. 접선은 강화도에서 시작된다. 탈옥한 지 근 2년이 되는 1900년 2월, 김창수는 김두래(金斗來)로 변명하고 강화도에서 가서 훈장 노릇을 서너달 하다, 유완무(柳完茂)의 비밀조직원 이춘백(李春伯)을 만난다. 두 사람은 동행하여 한양에서 유완무를 상봉한다. 유완무는 김창수에게 편지 한 통과 노자를 주면서 충청도 연산의 이천경(李天敬)에게 보내고, 이천경은 한 달 이후 편지를 주면서 전북 무주의 이시발(李時發)에게 보내고, 이시발도 편지 한 장을 주며 경상도 김천의 성태영(成泰英)에게 보낸다. 이 성태영의 집에서 김창수는 또 한 달여 기간을 머물게 된다. 성태영의 집은 매우 부유했고, 탈옥 청년 김창수는 푸르른 산촌에서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면서 여유작작하게 생활하였다. 


성태영의 (중략) 사랑에 들어가니 수청방(守廳房) 상노방(床奴房)에 하인이 수십 명이고, 사랑에 앉은 사람들도 거의가 귀족의 풍채와 태도를 가진 자들이었다. 주인 태영이 이시발의 편지를 보고 환영하여 상객으로 대우하니, 상노 등이 더욱 존경하는 태도로 나를 대하였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能河)요, 호는 일주(一舟)이다. 그와 함께 산에 올라 나물 캐고 물가에 가서 고기 구경하는 등 여유로운 생활을 해가며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면서 또 한 달여를 지냈다.  - 『주해 백범일지』 중에서


『백범일지』에는 성태영의 집이 ‘지례군(知禮郡) 천곡(川谷)’에 있다고 되어 있지만, 천곡은 월곡(月谷)의 착오이다. 이곳은 현재 경북 김천시 부항면 월곡 마을이며, 우리말로 ‘달이실’이라고 한다. 산 중에 있는 아름답고 작은 이 마을에는 한가운데 계천이 남북으로 흐르는데, 마을의 동북 지점에 성태영의 집이 있었다. 성태영의 집은 명문대가였지만 현재는 없어졌고, 후손들도 이 마을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집터에 들어선 새로운 집의 입구에는 〈백범 김구선생 은거지〉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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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영(좌) / 김천 달이실 백범 김구의 은거지(우)


김구(金龜)의 탄생

1900년 5~6월 강화를 떠난 지 3개월 정도 지난 8월경 어느 날, 유완무가 성태영의 집에 와서 김창수와 3자가 회동하였다. 이때 유완무와 성태영이 김창수의 이름을 김구(金龜)로 바꾸고, 호를 연하(蓮下)로 지어주었다. 이름을 고치고 호를 얻는 것은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결정이다. 개명의 이유는 김창수란 이름이 치하포 사건과 인천감옥 탈옥 사건의 범인으로 등재되어 앞으로 새로운 비밀 활동을 하는데 사용하기 불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수(昌洙)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金龜)라 하고, 호는 연하(蓮下), 자는 연상(蓮上)으로 행세하기로 하였다.  - 『주해 백범일지』 중에서 


그런데 새 이름이 왜 하필이면 ‘거북 구(龜)’인가? 이 점이 궁금하여 2017년 4월 7일 성태영의 집이 있었던 월곡에 찾아갔다. 심심산중의 이 마을에는 백범 관련 기념비가 세 군데나 있었다. ① 마을 입구 ‘월곡숲 공원’에는 〈백범 김구선생 은거 기념비〉가 있으며, ② 마을회관 앞에는 마을의 수호신인 두꺼비상이 연꽃 위에 앉아 있는데, 그 아래 안내문에도 백범이 언급되어 있으며, ③ 성태영의 집터에는 앞서 본 〈백범 김구선생 은거지〉라는 안내석이 있다. 그중 마을회관 앞 두꺼비상 아래에 있는 〈월곡 마을의 유래와 자랑〉은 아래와 같다. 


월곡 또는 달이실이라는 마을 지명은 마을 중앙을 관류하는 하천변에 떠오르는 달을 쳐다보는 두꺼비 형상의 바위가 있음으로 해서 얻은 지명인데, 예부터 마을 주민들은 바위가 마을의 안위를 지켜주는 수호신이라 하여 신령시 했다. (중략) 특히 달이실 마을은 민족의 등불이신 백범 김구 선생이 22세 되던 해인 1896년 우리 마을 성태영의 집에 한 달간 머무르신 자랑스러운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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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백범 김구 선생 은거지 표지석, 월곡마을의 수호신인 연꽃 위 두꺼비상, 도로 밑에 묻히고 남은 거북바위 앞부분


백범이 월곡에 머문 시기는 위 안내문에 있는 ‘22세 되던 해 1896년’이 아니라, ‘25세 되던 1900년’이다. 안내문에서 연꽃 위에 있는 동물은 ‘두꺼비’지만, ‘달을 쳐다보는 두꺼비 형상의 바위’가 〈월곡마을 보물지도〉(안내판)에는 ‘거북바위’로 표기되어 있다. 즉 달을 바라보는 거북 형상의 바위가 이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것이다. 이 거북바위가 성태영의 집 바로 앞개울가에 있다. 현재 안타깝게도 대부분 도로 밑으로 들어갔지만, 머리 등 앞부분 일부는 남아 있다.     

1900년 유완무와 그의 조직원들은 치하포 사건을 일으켰다 탈옥한 청년 김창수를 오랫동안 이리저리 시험해보고, 8월 경 심심산촌 달이실의 지사 성태영의 집에서 김창수를 조직원으로 포섭하면서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것이 거북이, 즉 ‘구(龜)’였다. 거북바위가 달이실 마을을 지키듯이 무너지는 나라를 지키는 귀한 인물(조직원)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거북이, 연꽃 아래 거닐다

달이실 성태영의 집에서 김구(金龜)로 개명과 더불어 호를 연하(蓮下), 자를 연상(蓮上)으로 정했다. 백범은 상민 출신이어서 호나 자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호와 자이다. 그의 자와 호에 연꽃이 등장해서 마곡사 승려 생활 등 불교와 관련이 있는 것인 양 추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반대에 가깝다. 즉 유완무 그룹의 항일 비밀결사와 연결되는 것이다. 연꽃 또는 연잎 위에 있는 거북은 지극한 상서로움을 상징한다. 이에 대해서 사기(史記)의 기록이나 이백의 시도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96호와 보물 452호의 주자(注子)가 바로 연꽃 위에 앉은 거북의 상서로운 모습이다. 달이실의 거북바위 앞에도 연잎 또는 연꽃 모양의 바위가 있으며, 마을회관의 두꺼비상도 연꽃 위에 있다.

연잎이나 연꽃 위의 거북은 지극히 상서로운 것이지만, 난세에는 거북이 잡힐 수가 있다. 장자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기어 귀중하게 되기보다,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바란다는 구절이 나온다. 즉 난세에는 거북이가 연잎 아래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면서 잠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일 지사 유학자인 이남규(李南珪)는 난세를 맞이하여 오르길 꺼리는 거북을 시로 노래한 바 있다.

 

玄龜出丹水 단수에 사는 현묘한 거북은

老骨靈以通 늙은 귀각(龜殼, 老骨)이 영통하다네

蓮葉堪棲托 연잎 위에도 오를 수 있지만

但恐遇寒風 차가운 바람을 만날까 그것이 두려워라

 

1900년 여름 어느 날, 유완무와 성태영이 탈옥수 김창수의 이름을 구(), 호를 연하(蓮下)로 지어주었던 것은 김구가 난세인 풍진세상에서 연꽃 밑을 잠행하지만, 언젠가는 연꽃 위에 올라오는 거북이 되기를 염원한 것으로 보인다.

김창수는 이날부터 김구(金龜)-연하(蓮下)로 호명되다가, 1914년 인천 옥중에서 이름을 구(), 호를 백범(白凡)으로 바꾸게 된다. 그러니까 25~38세 청장년기를 김구(金龜)라는 이름으로 결혼도 하고, 항일 애국계몽운동을 왕성하게 전개하였다. 1909(34) 백범은 안중근 의거 직후 잠시 체포되었는데, 그때 그는 일제가 작성한 김구(金龜)라는 100여 쪽의 책자를 본 적이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이렇게 일제는 연꽃 아래를 잠행하던 거북이 김구(金龜)를 추적하고 있었고, 드디어 19111월 안악사건으로 김구를 체포하여 15년형을 선고하였다. 일제의 그물망에 걸린 거북이 김구(金龜)는 감옥에서 김구(金九)로 바뀌어 세상에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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