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독립공채, 얼마나 상환되었는가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BR />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독립공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부족한 재정을 메우고자 발행한 채권을 말한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재정은 중국 상하이에 주재한 동포에게 인구세(人口稅)를 부과하거나 국내외 각지에서 오는 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궁여지책에서 비롯된 것이 독립공채였다. 임시정부가 1920년 4월부터 이를 시행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넘었다. 발행 당시엔 독립 후 5년에서 30년 이내에 원리금을 갚겠다고 하였는데, 독립한 지 70여 년이 넘은 지금까지 얼마나 상환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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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9월 1일 구미위원회가 발행한 50달러 독립공채 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발행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자 중국 상하이와 미주에서 두 종류의 독립공채를 발행하였다. 전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원화 표시 채권, 후자는 미주 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달러 표시 채권이었다. 원화 채권 액면가는 100원, 500원, 1천 원 등 3종으로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 이시영의 직인이 찍혀 있고 발행금리는 연 5%였다. 달러화 채권은 이승만 임정 초대 대통령 이름으로 발행되었는데 10달러, 25달러, 50달러, 100달러, 1천 달러 등 5종이었고 금리는 연 6%였다. 상환 시 연 단위 복리 이자를 적용키로 했다.      

그러나 독립공채를 얼마나 발행했는지, 누가 이를 구매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주권을 잃은 식민지국의 채권이 국제시장에서 유통될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 구성원이 대부분 이를 구매했을 테지만, 독립한 후 상환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선뜻 나서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독립을 염원하며 기꺼이 이를 구매하였다.      

광복 후 1949년 6월 22일자 『경향신문』에 처음으로 ‘독립공채’와 관련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그런데 기사 제목은 “지난날의 독립운동은 이렇게 했다”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고, 게다가 발행 주체인 이승만이 다시금 대통령이 되었으나 독립공채를 상환하겠다는 기사가 아니었다. 신문 기사는 25년 전 발행한 독립공채 채권이 발견되었다며, 전북 옥구군(현 군산시) 대야면 산월리에 사는 임영선이 임시정부 요인으로부터 공채를 매입했던 일화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 뒤 이승만은 1949년 12월 기자회견에서 독립공채를 가진 자에게 변제하겠다고 언급하였지만, 그것은 주미대사를 통해 외국인에 한한 것이었다. 이것이 실제 얼마큼 이뤄졌는지도 알지 못한다.    

독립공채 상환과 관련해서는 『동아일보』 1950년 6월 10일자에 처음 거론되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사는 안 모 씨(62세)의 남편이 미국에서 구입한 100달러 독립공채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간직해 오다가 재무부를 찾아가 상환해달라고 요청하였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재무부 직원은 법적인 근거가 없다며 그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때 상환되었다면 25만 원 이상이었다고 하니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15억 원이 넘는 큰 금액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관련 법 제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뒤 1953년 1월 구미위원부에서 1919년에 발행한 공채에만 6개월 내로 신고서를 작성하여 외무부 통상국에 제출하면 상환해준다는 방침이 정했을 뿐이다. 임시정부가 발행한 것에 대한 상환은 제외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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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2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이 발행한 1천 원 독립공채


독립공채 상환에 대한 조치

1962년 1월 전북 군산의 이병주가 일제강점기 때 땅속에 묻어뒀던 독립공채 1천 원권 3장을 상환해달라고 하면서 변화를 맞는 듯했다. 이는 작고한 아버지 이인식이 40여 년 전 일본 경찰의 눈초리를 피해 간직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였다. 이인식은 가산(家産) 1만 석을 팔아 8천 원의 독립공채를 매입하였는데, 3장은 병 속에 넣어 선산에 파묻었지만, 5장은 일본 경찰의 가택수색 당시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화장실에서 찢어버렸다 한다. 남은 3장으로 공채 상환을 청구한 것이다. 그 돈으로 선친의 묘소에 비석이라도 세울 요량이었다.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임정 공채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만들 것처럼 하고서는 끝내 외면했다. 그 뒤로도 간간이 독립공채를 상환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근거법이 없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1983년 12월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1984년 7월부터 상환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독립공채상환위원회’도 신설되었다. 다만, 특별조치법은 남한에 거주하는 사람이 1984~1987년 이내에 신고한 독립공채에만 상환하도록 규정했다. 그 뒤 1990년대 국교를 맺은 러시아·중국 등 54개국을 고려해 신고 기간을 연장하고(1994~1997년), 중국의 연변방송, 흑룡강신문, 길림신문 등에 ‘독립공채 찾기’라는 광고도 냈다.     

하지만 신고 건수가 예상보다 적어 기간을 2000년까지로 늘렸다. 그런데도 그 수는 크게 늘지 않았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러 당사자들이 작고하였으며, 그동안 분실한 것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손들 가운데는 독립공채에 관해 전연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간혹 신문에 ‘독립 염원 공채-편지 74년 만에 햇빛’이라는 기사가 실리곤 했다. 하지만 결과는 1차(1984∼1987년) 33건에 4천229만 원, 2차(1994~1997년) 1건에 564만 원, 3차(1998~2000년) 23건에 2억 9천448만 원으로 모두 57건에 3억 4,000여만 원에 불과했다.    

신고 기간인 2000년 12월 31일부로 끝난 뒤로는 상환 문의조차 뜸해졌고, 2009년에는 독립공채상환위원회도 없어졌다. 다만 ‘특별조치법’ 조항 가운데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 거주하거나 미수교국(未修交國)에 거주함으로 인하여 그 신고 기간 내에 신고할 수 없는 자에 대한 신고 기간은 따로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규정에 독립공채 상환은 아직도 유효하다.     

비록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하면 5년에서 30년 이내에 갚겠다던 약속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지만, 북한 주민들이 가진 독립공채에 대해서 ‘독립하면 상환한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2022년 새해 임인년(壬寅年)을 앞두고 남북한 간에 종전 선언만이라도 이뤄져 가능성이 실현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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