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관

광야에서 목 놓아 조국을 노래한 

시인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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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낙천(배재대학교 인문사회대학장)



이육사는 조국 상실의 시대를 불길처럼 맹렬하게 살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을 실천한 독립운동가요,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민족 시인이었다. 또한 조국 광복의 염원을 초인적 극복 의지를 통해 표현하고, 시련이 오히려 강철처럼 단단한 신념이 된다는 것을 무지개 역설을 통해 형상화한 애국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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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저항의 삶을 살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 도산면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6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원록 또는 원삼이다. 이육사는 퇴계 14대 손으로서 전통적인 유학자의 절개와 가풍을 지닌 집안 배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어렸을 때는 보문의숙이라는 신식 학교를 운영했던 할아버지 이중직으로부터 전통 한학을 배웠다.      

12세인 1915년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기울어지자 가족들은 대구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이육사는 서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서병오 선생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17세 때인 1921년에는 영천 출신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한 후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에서 1년 동안 공부했는데, 이때 원삼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이육사는 1923년부터 9개월 동안 백학학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23년 말 일본 유학길에 올라 1년 정도 공부하고 귀국한 이육사는 1925년에 독립운동가 서상일 선생이 민족 계몽운동을 위해 세운 교육 기관인 조양회관의 신문화 강좌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청년들과 시국을 논하였다. 1925년에는 형 원기, 동생 원일과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이 일어났고, 수사가 미궁에 빠지자 일본 경찰은 대구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였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이육사는 형 원기, 동생 원일과 함께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7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29년 11월부터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점차 확산되었고, 1930년 1월 대구에서도 동맹 휴업과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는 이른바 대구격문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당시 대구청년연맹 간부였던 이육사를 체포하였다. 그는 이후로도 일생 동안 무려 17번의 옥고를 겪었다.      

이렇듯 이육사는 일찍부터 각종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중국을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경찰에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1944년 1월에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베이징의 일제 영사관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이육사의 유해는 의열단 단원이자 친척인 이병희가 수습하여 화장했고, 연락을 받은 동생 이원창이 유골을 서울로 가져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가, 1960년에 고향으로 이장되어 영면에 들었다.     

사실 육사라는 이름은 수감 번호에서 유래한 것인데,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이육사의 수인번호가 264번이었다. 이에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조국의 식민지 통치 역사를 뒤엎겠다는 의지를 담아 ‘죽일 육(戮)’, ‘역사 사(史)’를 사용한 ‘육사(戮史)’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이름이 너무 혁명적이고 노골적이라 일제의 눈총을 받을 것을 염려한 집안 어른의 조언으로 평평한 산꼭대기를 뜻하는 ‘육(陸)’ 자로 바꿨으며, 이후 자신의 아호를 ‘육사(陸史)’로 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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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시집』, 서울출판사(1946)

문학으로 일제에 맞서다

이육사는 생애 후반에 총칼 대신 문학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중국을 오가며 항일운동을 하던 그는 1933년 7월 잠시 국내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해 9월 ‘육사(陸史)’라는 필명으로는 처음으로 정인보 선생이 주도한 잡지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행적으로 또다시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일제의 집요한 감시 속에서 이육사의 저항 정신은 매섭게 불타올랐으며, 조국 독립의 헌신적 열정과 인고의 극복 의지를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1935년부터는 『신조선』에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후 시조, 소설, 수필, 평론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6년에는 유고를 정리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시집 『육사 시집』이 나왔다.      

이육사의 시는 식민지 치하에 민족이 처한 현실을 비분강개하는 소재와 주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광복의 희망과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고 있는데, 5연으로 구성된 시 ‘광야’의 4연과 5연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4연에서는 마치 한시의 한 가락을 연상시키는 높고도 매운 품격을 보여주고, 5연에서는 변형된 자화상인 초인을 통해 도도한 기상과 강인한 독립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특히 그의 대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절정’은 불굴의 지사적 기개와 고도의 상징이 시적 언어의 절제미로 극대화되어 있다. 시 ‘절정’은 전체적으로 일제 치하에서의 고통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는데, 3연에서 일제의 억압과 시련이라는 현실적 극한 상황에 대한 파악을 제시한 다음, 4연에서 현실적 공간에서 초월적 공간으로 비상하는 시적 전환을 이루고 있다. 시 ‘절정’의 마지막 4연은 다음과 같다. 즉, ‘겨울’과 ‘강철’로 상징되는 일제 치하의 극한 상황과 단단한 저항 정신이 ‘무지개’라는 역설적 초극 의지로 승화되어 꿈과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 가히 식민지 시절 독립 투쟁과 저항 정신의 극점을 보여주는 저항시의 백미라고 하겠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가 남긴 시는 총 36편뿐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있어 시란, 일제에 저항하고 상실된 조국을 되찾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고 초인적 기개를 형상화하여 마침내 그 염원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저항시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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