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독립운동 동지로서 서로를 배려한 

오영선과 이의순

아름다운 인연<BR />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오영선은 일찍이 구한말  육군무관학교를 나온 우국 장교로 항일 운동에 직접 참가, 임시정부 군무부장이라는 요직까지 오른 영도자이다. 그의 부인 이의순은 이동휘의 딸로 우리나라 여성 애국 운동의 선각자이기도 했다.『명수산문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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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순과 오영선 가족사진


근대교육으로 민족의식에 충만하다

오영선은 중추원 의관을 지낸 오평묵과 고씨 부인의 장남으로 1886년 4월 13일에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이다. 호는 기윤, 다른 이름은 윤길이다. 별명으로 석농(石濃, 石農)을 사용했다.      

오영선은 독립운동 중 이동휘의 둘째 딸 이의순을 만나 혼인하였다. 이의순은 중국 동북지역 명동촌의 명동여학교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 삼일여학교 등지에서 민족교육에 힘쓰고,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그녀의 집안은 할아버지 이승교(일명 이발), 아버지 이동휘, 언니 이인순과 형부 정창빈 등 삼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특히 장인 이동휘는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후 강화도를 중심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대한제국기를 대표하는 교육운동가였다.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민족 지도자로서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배재학당에서 근대교육 수혜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과외활동을 통한 민권·자유·평등 등에 대한 관심은 훗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든든한 정신적인 지주였다. 오영선은 개성 보창학교(보창학교지교)에서 3년 정도 교편을 잡았다. 이동휘가 설립한 보창학교(전신 육영학교)는 강화도 내는 물론 경기도 개성·장단, 황해도 금천·풍덕 등지에 지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의 요람지로 자리매김했다.  구국간성이 되고자 교사를 사직한 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하였을 무렵에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는 등 학교의 존폐 문제가 대두되었다. 학교가 문을 닫자 일본 도쿄수리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2년 후 중퇴하고 선교사 그리어슨(Grierson, R.)이 설립한 함경도 성진의 협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이동휘는 함경도 각지에서 교회와 사립학교 설립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은 장인과 사위라는 가족 관계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민족교육 시행에 앞장서다

이동휘가 북간도로 망명할 무렵 ‘이동휘의 교육생’인 추종자 30여 명도 행동을 같이 했다. 오영선은 삼국전도회와 간민교육회 등에서 설립한 광성학교·동림무관학교·북일중학교에 근무하였다. 관련 인물들은 기독교를 통한 신문화·신사상을 수용하면서 외국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을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광성학교는 중학과와 법률정치과를 두고, 부속으로 여자 야학과와 소학과를 운영하였다. 계봉우는 역사와 지리, 문경은 군사교육과 체육, 윤해와 김립은 법률과 정치를 담당하였다. 개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법률정치과와 중학과가 폐지되었으나, 사범속성과를 설치하여 졸업생을 배출했다. 당시 상황을 계봉우는 자서전에서 “교사 오영선은 명민하고 넘치는 맛이 있었으며”라고 언급하였다.      

1914년 4월에는 이동휘가 나자구에 설립한 동림무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중국 동북지역은 물론 국내, 연해주 등지에서 유학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무관학교는 군사훈련과 반일 민족독립사상 교양을 기본 목표로 삼았다. 일제 압력으로 폐교될 무렵에는 중국 훈춘현 대황구로 이동하여 북일중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수학·물리·화학을 가르쳤다. 중국 지방정부와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활동 무대를 연해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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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선 ‘신년의 신각오’, 『독립신문』(1922. 1. 1.)


한민족 대동단결을 외치다

신한촌의 자치기구인 신한촌민회의 의사부원, 1919년에는 대한국민의회 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8월 29일에 개최된 ‘병합기념일’에서는 박은식·이발·이의순 등과 함께 연설했다. 한편 임시정부 조직문제와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문제에 대한 회의에도 참석했다. 회의에 참석한 인물은 오영선을 비롯하여 이동휘·김립·윤해·계봉우 등이었다. 회의 결과는 윤해와 고창일이 대한국민의회의 신임장을 가지고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 이동휘가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하자 중국 상하이로 갔다.   

오영선은 『독립신문』 신년사 기고문에서 향후 독립운동 방향을 제시했다. 신년의 새로운 각오로 공과 사를 분간할 것, 책임감을 가질 것, 개인의 욕망을 억제할 것, 감정에 따르지 말고 이성적일 것, 타인의 단점이나 결점을 들추지 않을 것, 사물의 진상을 알기 전에 경솔히 평판하지 말 것, 동지의 언사나 행동을 선의로 대할 것 등 이상 7가지였다. 그는 개인들 사이에 화합·믿음·선의를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 독립운동계가 처한 임시정부의 승인, 개조 분쟁 등으로 통합 임시정부가 와해된 상태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오영선은 임시의정원에서 벌어진 국민대표회의 개최 문제에 대해 찬성 측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분열된 임시정부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갈등만 계속되는 상황을 매우 우려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개조파와 창조파는 여전히 반목하는 긴장된 관계였다.      

한편 이때를 전후로 오영선은 이동휘와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김립이 이동휘에게 러시아에서 가져온 자금을 공산당과 관련하여 사용하자고 주장한 반면 오영선·이의순 부부는 김립의 의견에 반대했다. 줄곧 이동휘 계열과 함께 활동하던 오영선이 상하이에 머무르며 다양한 계열의 독립운동가를 만난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안공근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동휘의 행동에 대해 “모든 한국인에게 수치가 되고 있다”라고 격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1924년 박은식이 새로운 내각을 꾸리면서 오영선은 12월 17일자로 법무총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재임 중 헌법을 개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5월에는 임시정부 대표로 이유필과 함께 정의부에 파견되었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 위원들을 만나 여러 안을 제시하며 참여를 호소하였다. 몇 가지 사항에 합의하였으나 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 사이에 의견 충돌이 벌어졌다.      

분열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독립운동계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좌우세력이 통일된 전 민족적 대당결성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하여 대동단결을 주장하였다. 군무를 맡는 군무장과 이동녕 주석하에 외무를 담당했다.        

오명선은 임시정부 외곽단체에서도 활동했다. 대한적십자회는 회장 손정도와 부회장 안정근, 재무원 이유필 등으로 회원은 80여 명이었다. 대한적십자회는 청연서를 신문에 게재해 훈춘사건 등으로 피해 입은 한인사회를 구제하기 위해 의연금 지원을 여러 차례 호소했다. 이사장인 손정도가 만주로 떠나자 그의 후임자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오영선은 한국노병회에서도 설립 초반부터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10년 안에 1만 명의 노병 양성과 100만 원의 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삼았다. 다른 활동은 교민단 학무위원으로 활동이다. 교민단은 처음에 자치기관으로 시작하여, 상하이 동포사회의 일반적인 행정 업무가 대부분이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임시정부의 지방행정기관과 독립운동 지원 기관으로서 양면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오영선은 1931년 12월 24일에 신병으로 출석하지 못해 의정원 의원 자격을 상실하였다. 『백범일지』에서는 당시 상황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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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한 대한적십자회(1920)

대가족 중에 빠진 식구들이 여럿 있으니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상해의 오영선, 이의순-이동휘의 딸- 부부와 그 자녀들이다. 오영선 군은 몸이 불편하여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바람에 대가족에 합류하지 못했다. 몇 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때는 이미 상해가 완전히 적에게 함락되어서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었다(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오영선은 1939년 3월에 사망했고, 이의순은 1945년 5월에 사망했다).


급기야 오영선은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이동할 때 함께 하지 못하고 상하이에 남아 있다가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임시정부의 통합을 주도한 오영선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삼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다  

이의순은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에서 아버지 이동휘와 어머니 강정혜 사이에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빈(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이다.      

언니 이인순은 독립운동하는 아버지를 지원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하였다. 이인순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1월에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버지를 도와 독립의 선봉장을 자임한 신여성이 열악한 환경으로 27세에 요절한 것이다. 그녀가 숨진 이후 아들 정광우마저 5세의 어린 나이로 역시 장티푸스로 숨졌다.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모자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남편 정창빈은 이듬해에 1월 27일에 자살하였다.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동포사회는 1920년 1월 17일 낮 2시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주최로 이인순과 김란사(일명 하란사)·김경희 등의 추도식을 열었다. 이때 내빈으로 참석한 안창호·김립·윤현진 등 30여 명은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이인순의 추도식을 상하이에서 개최한 사실은 그녀의 존재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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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1919)


한인사회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여권 신장에 노력하다  

아버지가 강화진위대장으로 부임하자 이의순은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였다.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로 일찍이 정신여학교에서 근대교육 수혜를 받았다. 일제 강점 이후 가족을 따라 중국 동북지역으로 건너가 국자가에 정착했다. 지린성 허륭현 명동촌에 있는 민족교육의 요람지인 명동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의순은 교사로서 정신태·우봉운 등과 함께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이의순은 인근 마을에서 야학을 운영하는 한편 부흥사경회를 개최하는 등 한인 여성들 자부심을 일깨웠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신한촌 삼일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3·1운동 이후 8월 29일 국치기념일 행사를 부부가 주관했다. 이의순은 “우리는 여자라고 하지만 대한민족이라면 일반적으로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이상 어찌 안이하게 좌시할 수 있겠는가. 국내에서는 많은 여학생이 피를 흘렸는데 해외에 있는 여자들도 어찌 수수방관하고 집안의 안락을 욕심내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원수의 총칼 아래서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칠 것을 우리들의 행복이라고 믿는다.”라며 여성도 남성과 같이 독립운동에 헌신하자고 호소했다.       

채성하의 장녀 채계복과 함께 상하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조직은 남성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독립운동 분위기를 조성하여야 한다는 취지로 결성되었다. 나아가 여권을 신장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또한 독립전쟁에서 활동할 간호부 양성을 위하여 적십자회 조직에도 분투하였다. 그녀는 여동생 예순, 러시아지역 독립운동가 채성하의 딸 계복·계화, 간도애국부인회장 우봉운 등과 함께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했다. 특히 채계복은 정신여학교 후배로 러시아 대한적십자회 간호부로서 우리 여성들이 미국적십자사에서 간호 기술을 습득하도록 주선하는 등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한 오영선과 결혼했다. 아버지가 임시정부와 결별한 뒤에도 계속 상하이에 남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의순은 1930년 8월 11일 인성학교 교장 김두봉의 부인 조봉원 등과 함께 기존의 여성단체 조직인 상하이 한인부인회를 개조하여 급진적인 상하이 한인여성동맹 조직에 앞장섰다. 그러나 한인사회 여성운동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등으로 상하이 여자청년회를 조직하려는 창립대회 준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홍커우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안착할 때까지 ‘물 위에 떠다니는 이동 정부’였다. 이의순은 남편병간호와 자녀 양육을 하다가 1945년 사망했다. 정부는 공적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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