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근대 러시아의 대동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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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류한수(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모든 나라의 역사에 위기가 없지 않겠지만, 러시아는 유난스레 격심한 위기를 여러 차례 헤치며 나아가야 했다. 한반도가 임진왜란과 양대 호란을 겪던 시절, 러시아도 외세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나라가 곧 망할 위험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러시아 역사가들은 위태롭기 짝이 없던 이 시기를 ‘대동란 시대’라고 일컫는다. 러시아가 앓았던 심한 몸살과도 같았던 대동란 시대의 전모를 들춰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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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 작,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뇌제의 정신 이상과 왕조의 단절

두 세기에 걸친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러시아를 16세기 동유럽에서 강하게 키워낸 군주가 이반 4세였다. 러시아에 남은 몽골 세력을 마저 제압하고 영토를 넓힌 이반 4세는 자신감에 차서 러시아 군주의 칭호를 대공에서 차르로 바꾸었다. 그는 치세 말기에 귀족과 반대파를 잔혹하게 억압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탓에 ‘뇌제(雷帝)’, 즉 ‘끔찍한 차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말년에 정신 이상에 시달리던 이반 4세가 1581년 11월 16일에 맏아들 이반을 쇠몽둥이로 쳐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20대 후반의 아들 표도르와 두 살이 안 된 늦둥이 드미트리를 남기고 1584년에 숨을 거두었다.     

이후 아들 표도르가 차르로 즉위했지만, 워낙 허약하고 착하기만 해서 실권은 처남인 보리스 고두노프에게로 넘어갔다. 수완 좋은 고두노프가 권력을 거머쥐고 있던 시기에 큰일이 일어났다. 이반 4세의 늦둥이 아들 드미트리가 1591년 5월 15일에 집 안뜰에서 목이 베인 채 싸늘히 식은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열 살이었던 드미트리가 칼을 가지고 놀다 간질 발작이 일어나서 스스로 칼로 목을 찔렀다는 것이 공식 조사 결과였지만, 고두노프가 야심을 품고 제위 계승 후보자인 드미트리를 미리 제거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와중에 표도르가 1598년에 숨졌고, 고두노프가 뒤를 이어 차르의 자리에 올랐다. 700년 넘게 이어지며 혈통의 측면에서 군주의 권위를 떠받쳐온 정당성의 원천인 류리크 왕가의 계보가 끊기는 순간이었다.     

고두노프는 뛰어난 위정자였지만, 한반도에서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에 시작된 그의 치세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1601년에 가뭄이 들었고, 1602년과 1603년에는 흉작이 이어졌다. 돌림병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때 “자기가 사실은 1591년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다. 이 ‘가짜 드미트리’는 동유럽의 강국이자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로 가서 “자기를 러시아의 군주로 만들어주면 러시아의 국교를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가짜 드미트리는 폴란드 세력을 등에 업고 1604년 10월에 러시아를 침공하였다. 이듬해 4월에 차르 고두노프가 숨졌고, 두 달 뒤에 가짜 드미트리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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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시 붉은 광장의 동상, 국민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구해낸 두 지도자 미닌과 포쟈르스키          


위기의 연속, 제2·3의 가짜 드미트리

러시아의 최고 권력자가 된 가짜 드미트리는 곧바로 러시아의 민심을 잃었다. 그와 함께 온 폴란드 군인들은 툭하면 모스크바 시민과 충돌하였다. 더욱이 가짜 드미트리는 1606년 5월에 폴란드 여인 마리나 므니제치와 결혼식을 올렸다. 종교가 곧 민족의 정체성이던 시절에 가톨릭 신자를 국모로 모셔야 할 신세였다. 이를 참지 못한 러시아 정교회와 모스크바 시민이 봉기하여 가짜 드미트리를 죽이고 붉은 광장에서 그의 주검을 불태웠다. 그리고 봉기자들이 드미트리 주검의 재를 대포알에 담아 폴란드 쪽으로 쏘았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가짜 드미트리는 사라졌다. 그런데 1607년 8월에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나서 모스크바를 노렸다. 그는 모스크바 가까이 있는 투시노 마을에 근거지를 두고 별도의 조정을 꾸렸다. 이 내분을 틈타 북유럽의 강호였던 스웨덴이 끼어들었고, 폴란드의 국왕은 아예 스스로 러시아의 차르가 되겠다고 나섰다. 1610년에 러시아 서부와 모스크바는 폴란드의 손아귀에 있었고, 러시아 북부는 스웨덴 차지가 될 참이었다. ‘투시노의 도적’이라고 불리던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그렇게 난동을 부리다 12월에 부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이던 이때, 정교회의 게르모겐 모스크바 총주교가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 격문을 돌렸다. 그는 군대를 일으켜 이교도 폴란드인을 물리치고 모스크바를 구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호응해서 결성된 러시아 ‘국민군’이 모스크바로 다가왔지만, 온갖 세력으로 이루어진 군대인지라 내분이 일어났고 모스크바의 폴란드 군대는 시가지를 불태우며 버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 번째 가짜 드미트리까지 나타나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위기의 연속이었다.


대동란의 종식과 새 황조의 시작

바로 이때 위기를 극복하는 러시아의 놀라운 능력이 발휘되었다. 러시아 남부의 도시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미닌이라는 평민이 시민들을 설득해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귀족인 포자르스키 공을 설득해서 거사에 끌어들였다. 정교회의 지지를 받는 두 번째 국민군이 결성되었다. 제2차 국민군이 1612년 9월에 모스크바에 이르렀고, 세찬 싸움 끝에 모스크바 도심에서 버티던 폴란드 군대를 쳐부쉈다. 러시아가 내분을 이겨내고 외세를 몰아내는 순간이었다.

이듬해 초에는 특별 의회가 열렸다. 러시아의 성직자, 귀족, 시민, 농민 등 500명을 웃도는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류리크 계보의 마지막 차르였던 표도르 1세의 친척인 16세 귀족 소년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 차르로 추대하였다. 7월 21일에 즉위식이 거행되었고, 300년 넘게 지속될 로마노프 황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류리크 계보가 끊긴 1598년과 로마노프 황조가 세워진 1613년 사이의 15년 남짓한 ‘대동란 시기’에 금방이라도 나라가 허물어질 듯한 위기를 딛고 일어섰다. 그 뒤 두 세기 안에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년)와 예카테리나 대제(재위 1762~1796년)를 거쳐 유럽의 열강으로 발돋움했다. 용수철처럼 움츠렸다 되튀는 러시아의 특성이 보란 듯이 나타난 러시아 근대사의 한 페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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