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의병전쟁, 독립군, 한국광복군 가족을 탄생시킨 

오광선과 정현숙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아버지, 부부, 두 딸들, 그리고 맏사위까지 3대가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를 이끈 주인공은 용인시 해주 오씨 일가의 오광선과 정현숙(본명 정정산) 부부이다. 40여 년에 걸친 가족사는 세계사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독립투쟁사로서 자랑스러운 한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이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닌 너무도 평범한 한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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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선과 정현숙 부부


조국 광복 염원은 오씨 일가의 일상사였다 

오광선은 1896년 5월 14일 용인군 원삼면 죽능리 어현(일명 느리재)에서 아버지 오인수와 어머니 이남천 사이에서 4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로 초명은 성묵(性黙)이다. 아버지는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사냥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용인과 죽산 등지에서 의병부대 중군장으로 활약한 ‘구국간성’이었다. 전투 중 부상을 입어 몰래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매국노 송병준 아들이 이끄는 자위단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분신과 같은 애견(愛犬)의 처참한 죽음이 오광선에게 조국 독립에 투신하기로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어려운 경제 사정에도 배움에 대한 열망은 강렬했다. 오광선은 여준(呂準)이 고향에 설립한 삼악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버지가 옥살이하는 동안 그는 소학과 및 고등과를 차례로 졸업하였다. 아버지가 출옥하자 큰아버지는 서둘러 결혼시켰다. 신부는 산 넘어 사는 이동면 화산리 출신의 14세 정현숙(본명 정정산)이었다.

 

신흥무관학교과 청산리전투에서 존재감을 알리다

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품은 오광선은 달콤한 신혼생활에 안주하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가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였다. 이곳은 서간도 룽징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한 뒤 오산학교에 재직한 여준이 학감을 지낸 대표적인 민족사학이었는데, 105인사건 이후 간악한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오광선은 은사인 장지영의 소개로 잠시 한약국 급사로 일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했다.베이징에 무사히 도착한 오광선 일행은 신규식의 도움으로 중국 보정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광선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조선의 광복을 되찾겠다는 의미였다. 폭탄 제조법은 물론 특수훈련을 받다가 중국 내전으로 중도에 그만두었다. 방황을 거듭하다가 ‘독립군 양성의 요람지’인 신흥무관학교로 향했다. 펑톈(奉天, 선양의 옛 명칭)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 한인 동포들 도움으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교장 여준의 주선으로 무관학교에 입학한 오광선은 1918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지청천이 신흥무관학교 교육훈련대장에 취임한 후 오광선도 교관을 맡았다. 3·1운동 이후 서로군정서와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는 긴밀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연합부대는 청산리전투에서 대승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오광선은 서로군정서의 중대장, 대대장, 별동대장, 경비대장으로 각종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자유시참변 이후 지청천과 채영·오광선 등 간부급 82명은 중범자로 분류되어 이르쿠츠크 군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수형생활은 춥고 배고팠을 뿐만 아니라 가혹한 민족 차별과 전향을 강요당했다. 오광선은 야음을 틈타 칼바람과 배고픔을 이겨내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곧바로 그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독립군의 무사 귀환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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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악학교 터


독립군 양성과 독립전쟁으로 민족 해방에 나서다

1930년대 초반 만주의 정세는 일본군의 침략 노골화로 매우 불안하였다. 위기에 대응한 재만 한인 세력의 대동단결과 무장투쟁 역량 강화는 우선적인 과제였다. 지청천과 홍진 등의 한국독립당 결성은 이러한 시대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오광선은 군사부 위원이자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길림구국군과 합류하여 항일 공동작전을 펼쳐 쌍성보·경박호·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 관동군과 ‘괴뢰정부’ 만주국 압박, 중국자위군과 갈등 등으로 동북지역에서 독립전쟁 수행은 어려움에 처했다. 한편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국민당은 임시정부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1934년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편성되었다. 총책임자인 지청천은 오광선을 교관으로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맡겼다. 한인반은 갈등과 불신 등으로 2기생을 배출하고 이듬해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오광선은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베이징에서 비밀공작대를 조직하였다. 주요 임무는 중국 동북지역에 독립전쟁기지를 재건할 목적이었다. 1936년부터 베이징에 금은방을 개업하여 비밀리 활동에 나섰다. 톈진에서 난징으로 이동한 가족들은 임시정부의 요인들 가족과 합류하였다. 베이징에서 첩보활동에 매진하던 오광선은 관동군 참모장인 도이하라(土肥源) 중장 암살을 준비하던 중 근거지가 노출되고 말았다. 


“김구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한테 비밀공작 사명을 맡겼어. 청년 몇 명 데리고 가서 비밀공작을 하라고…. 아버지는 북경서 금은방을 했는데, 어떤 한국인 스파이한테 걸려서 별안간 다들 자는데 한밤중에 우당탕 쳐들어와 담을 넘어서 잠옷 바람에 다 걸렸대요. 고문형을 받아서 일본 순사들이 가시로 막 찌르고 고문해서 정신을 몇 번 까무러쳤대요. 그래도 중국 낙양군관학교만 나왔다고. 끝끝내 다른 얘기를 안 했대요. 여기 ‘오원지(吳原之)’는 중국 사람으로 행세한 거잖아요. 신흥무관학교 나왔다고 하면, 죽이지 뭐 한국 사람인데….”


혹독한 3년간 감옥생활을 마친 후 오광선은 다시 망명해 하얼빈 인근에서 항일 빨치산들과 만나 활동하였다. 그는 만주 여러 곳에서 지하활동을 꾀하다가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었다.


한국광복군 국내지대장과 국군의 뿌리가 되다

곧바로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을 만나자 그를 국내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임무는 미군정 당국과 협의해 한국광복군을 정식 군대로서 인정과 국군 자격으로 입국이었다. 미군정 하지 중장과 담판하였으나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지청천의 대동청년단 조직에도 가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육군사관학교 8기생 특별반으로 입교하여 육군 대령으로 임관되었다. 한국전쟁을 겪고 전주지구위수사령관을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청우회 등 국군 권익을 위해 활동하다가 1967년 서울시 이문동 셋방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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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기강, 1940. 6. 17.)


아낙네로서 가정 살림을 도맡다

1900년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에서 고명한 딸로 태어난 정현숙은 엄격한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 결정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사는 오광선과 부부가 되었다. 강고한 인습이 남아 있는 현실에서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연약한 아낙네에 불과했다. 결혼생활에 대한 달콤한 기대와 달리 빈곤한 시집살이는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남편은 이듬해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고자 상경하였다. 이후 항일운동에 투신하고자 홀연히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남편의 무소식에 집안 분위기는 항상 싸늘했다. 시부모 봉양과 가정 대소사는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노력에도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만주벌 독립군의 어머니로서 자리매김하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재임하던 오광선은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랜 기다림과 반가운 소식에 가족들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기차를 타고 중간에 내려 도보로 한 달을 걸어 목적지 합니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눈물겨운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 무렵 자신과 가족들 안전을 위해 ‘현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액목현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으나 마적단의 습격과 추위,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정현숙은 오희영과 오희옥 자매를 낳았다. 정현숙 일가는 이곳에서 화전을 일구고 옥수수와 조를 심어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쌀을 구할 수 있을 때는 1년에 오직 한 번 설날이었다. 남편은 불쑥 학생이나 부하 등을 데려와 밥을 먹였다. 가족들 끼니조차 챙기기 힘든 상황에도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야만 했다.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정현숙은 ‘만주벌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애칭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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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해주오씨 기적비


오희영·오희옥 자매를 당당한 여성광복군으로 키우다

이후 남편을 따라 중국 관내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남편은 베이징에서 비밀공작대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들 가족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부모님의 독립운동을 지켜보던 딸들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하여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오희영은 먼저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초모공작 등에서 활약하였다. 동생 희옥도 공립중학교 3학년 다니다가 가장 어린 나이로 한국광복군에 지원하였다. 맏딸은 일본군에 맞서면서 선전활동과 초모공작에 투입되었다가 김구 주석의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주석의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신송식과 결혼하였다.     

정현숙은 한국혁명여성동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가 자녀들에게 역사·한글·창가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임시정부에 뒷바라지에도 적극적이었다. 만주벌판의 차디찬 칼바람과 중국 관내 등지에서 30여 년에 걸친 유랑생활은 오직 자유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욕으로 감내할 수 있었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곱씹어 보자

정현숙 일가의 삶은 기나긴 이별과 짧은 만남의 연속이었다. 광복으로 가족들은 오랜만에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청빈하고 강직한 남편은 단독주택 한 채도 소유하지 못했다. 국외에서 떠돌이 생활과 별반 나아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1974년 광복절에 즈음하여 방문한 기자에게 정현숙은 평화로운 남북통일에 대한 희망을 내비쳤다. 이미 큰 딸 오희영이 사망한 지 6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젠 오래 살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군요. 소원이 있다면 남북통일이라고나 할까요?”     

정부는 1962년 오광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시작으로 큰사위와 큰딸, 그리고 둘째 딸 등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작은 딸 오희옥이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은 5년이나 지난 시점에 해주 오씨 집안에 3대 독립운동을 지탱한 정현숙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워킹맘’에 대한 가혹한 평가는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애틋한 가족사는 우리에게 감동이자 무거운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세계사 속에 우뚝 선 오늘날 대한민국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풍요 속의 빈곤에 따른 계층과 지역 사이의 대립 갈등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심각하다. 오씨 일가의 ‘시대 소명’에 충실한 인생 항로에서 우리 자신들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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