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을사늑약에 죽음으로 항거한

순국지사들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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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전문』(1905. 11. 17.)(좌) / 을사늑약 체결 기념사진(1905)(우)


을사늑약 반대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목적으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을사늑약은 고종황제의 날인 없이 국제법을 무시한 상태에서 강제 조인된 불법 조약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인들은 반대 상소를 올리거나 자결 순국하는 등 거세게 반대하였다. 특히 이때 거행된 자결 순국은 자신의 목숨으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강렬히 규탄한 항일 의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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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사 김봉학 순국」, 『대한매일신보』(1905. 12. 5.)_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좌) / 홍만식 가족사진_한국 국학진흥원 제공(우)


대한제국 고관 홍만식과 군인 김봉학, 자결로서 을사늑약에 적극 항거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자결로서 적극 항거하였다. 대한제국 전직 고관 홍만식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20여 년간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그러던 중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전해 듣자 이를 통탄하며 1905년 11월 음독 순국하여 을사늑약 반대 의지를 알렸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소속 군인 김봉학은 1905년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입경하자 그를 처단하여 군인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처단 계획이 사전 누설로 실패하자 1905년 자결 순국하여 을사늑약 강제 체결에 적극 항거하였다. 두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62년 홍만식·김봉학에게 독립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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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석 유서」, 『황성신문』(1906. 5. 17.)_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좌) / 고종황제가 이상철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내린 조령 (1905. 12. 4.)(우)


대한제국 관료 이상철과 이건석, 자신을 바처 일제에 맞서다

대한제국 관료였던 이상철은 을사늑약 체결 이전부터 일제의 강압적인 국권 피탈을 규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불법 체결 후 민영환 등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뒤를 이어 음독 순국으로 을사늑약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건석은 1905년 유생들과 함께 13도유약소를 결성하여 을사늑약 폐기와 매국노 처단 등을 요청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 사령부에 의해 투옥되었다. 일제의 회유에도 옥중 투쟁을 이어나가다 1906년 순국하였다. 정부는 두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이상철에게 독립장, 1963년 이건석에게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매국역적들을 

죽이지 못하고 우리 국권을 찾기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석이 아들 이응수에게 전하는 유서 중에서(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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