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북한에 묻혀 있는 남측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모셔야 할 때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2006년 10월 1일, 한 장의 사진이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 적이 있다. 70세를 훌쩍 넘긴 이가 어머니의 영정을 들고 방북하여, 56년 만에 아버지 무덤 앞에 큰절을 올리는 사진이다. 200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를 창립한 김자동 선생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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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한과 정정화, 김자동


북한의 현충원,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

김자동의 아버지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부친 김가진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해방될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 한국광복군 등에서 활약한 김의한이다. 어머니는 ‘한국의 잔 다르크’, ‘임시정부의 안 살림꾼’, ‘여성 독립투사’, ‘임시정부의 맏며느리’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정정화이다. 이들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북한에도 우리의 현충원과 같은 현충 시설이 있다. 하나는 혁명열사릉이고 다른 하나는 애국열사릉이다. 둘 다 평양에 있지만, 묻혀 있는 분들이 언제 그리고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에 따라 안장된 장소가 구분된다.      

혁명열사릉은 김일성의 발기로 북한의 조선로동당 창건 30돌을 맞는 1975년 10월 대성산 주작봉 마루에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거나 그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를 맺었던 200여 명의 ‘항일혁명열사’들이 안장되어 있다.     

애국열사릉은 1986년 9월 신미리에 자리 잡았다. 당시 각지에 흩어져 있던 190위를 그곳에 모셨는데 항일투쟁을 비롯하여 북한 정권 수립과 그 이후 사회주의 건설, 통일사업, 당·국가·군대, 과학·교육·보건·문학예술·출판 보도 등 여러 부문 공로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는 혁명열사릉보다는 격이 떨어진다. 혁명열사릉에는 해당 인물의 비문 위에 동상이 세워져 있는 반면 애국열사릉에는 비문 위에 사진이 새겨져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두 개의 열사릉 가운데 독립운동과 관련한 것은 애국열사릉이다. 화강암 기단 위에 150㎝ 정도 높이로 세워진 비석의 전면 상단에는 사진을 새기고 하단은 검은 글씨로 고인의 이름과 생전의 약력, 생몰 연월일을 순서대로 새겨놓았다. 이름 뒤의 호칭은 동지, 선생으로 구분하였다. 몰년 뒤에는 대부분 ‘서거’라 표기하였는데 간혹 ‘희생’, ‘전사’ 등도 있다. ‘희생’은 남한에서 활동하다 죽은 인사들의 경우, ‘전사’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죽은 경우이다. 따라서 전자는 가묘인 경우가 많다.     

독립운동가의 경우 약력에 ‘반일애국지사’, ‘애국지사’, ‘항일혁명렬사’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중 ‘반일애국지사’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간접적으로 김일성과 관련성이 있는 인사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김보안(이명 김준택)·장철호·강제하 등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장을 받았다. 1930년대 조선의용군을 이끌며 혁혁한 전공을 일군 양세봉(1962, 독립장)의 무덤도 이곳에 있는데 ‘독립군사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애국지사’는 6·25전쟁 당시 납북된 인사들로 최동오·윤기섭·조완구·오하영·류동열·김규식 등이다. 당시 납북된 엄항섭과 조소앙은 각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최고위원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들의 호칭은 최동오(동지)를 제외하고는 ‘선생’으로 되어 있다. 이외의 인사 중에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전개한 박문규·백남운·이극로·이영·허헌·홍명희 등도 모셔져 있는데, 월북하였다 하여 우리 정부로부터는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북한에서 이들은 ‘동지’ 칭호를 받았다.       

‘항일혁명렬사’는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노동자·농민·청년 학생을 주축으로 창건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활동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동지’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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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열사릉에 있는 엄항섭 묘비(좌) / 애국열사릉에 있는 조소앙 묘비(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그런데 납북된 독립운동가 중에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지 못한 인사도 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앞서 언급한 김의한이다. 그는 평양시 룡성구역 특설 묘역에 있는 ‘재북 인사의 묘’에 안장되어 있다. 그곳에는 남한에서 정계·실업계·사회계·학계 등에서 명망이 높았던 62명이 묻혀 있는데, 전쟁 시기에 납북 또는 자진 월북한 사람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1956년 7월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가로는 김의한을 비롯하여 안재홍·정인보·원세훈·박열·명제세·김상덕·장연송·장현식 등이 묻혀 있는데, 이들은 납북하였지만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다만, 독립운동가이자 제헌국회에서 부의장까지 지낸 김약수는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던 김원봉과 김두봉 등은 연안파로 분류되어 1958년 숙청되었는데, 그들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1868∼1943)의 유해가 2021년 8월 15일, 서거 78년 만에 카자흐스탄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유해를 실은 한국군 특별수송기가 한국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하자 공군 전투기 6대가 엄호 비행을 하였다. 많은 국민에게 남다른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고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북한과 협상을 통해 납북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만이라도 남한에 있는 가족들 품으로 모셔와야 할 것이다. 당장 어렵다면 최소한 애국열사릉에 모셔져 있는 독립운동가의 현황을 꼼꼼히 살펴서 이들과 관련한 생몰년이라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백과사전이나 독립운동 관련 책자에 생몰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거나 미상으로 처리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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