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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지킨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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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주용(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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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군대(좌) /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는 대한제국군(우)


대한제국 군인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다

독립운동은 어느 특정 개인의 추동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개개인이 모여 각자의 신념을 펼친 곳이 독립운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양한 인물들 속에서 대한제국기 군인들이 독립운동계에 투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는 일본 육사를 거쳐 자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열정을 불태운 이도 있다. 노백린, 이갑, 유동렬, 지청천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 가운데 독립운동의 가시밭길을 걸은 이들도 상당수 있다. 신규식, 황학수, 김혁, 김창환, 신팔균, 이장녕, 이관직 등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와 같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는 근대식 군사학교였다. 생도(학생)들은 초급 교관이 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으며, 교과목은 전술학, 군제학, 병기학, 축성학, 지형학, 위생학, 마학, 외국어학 등이었다. 그 밖에 교관의 덕목과 자질을 함양시키는 체력단련 등에 집중하였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 군사적 강화를 목적으로 탄생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는 교과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다른 근대적인 ‘세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인생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러일전쟁 후 한반도에서 독점적 특권을 확보한 일제는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고문정치를 통해 전방위로 대한제국을 압박하였다. 그 결정판이 1907년 7월 이루어진 ‘정미조약’이었다.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에게 군대 해산이란 또 다른 선택의 길에 내몰리게 하는 것이었다.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군대 해산은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새로운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의 길이었다. 이장녕과 같이 낙향하면서 만주로 망명한 경우도 있으며, 1909년까지 군대에 남아 있었던 신팔균도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민족교육기관을 거쳐 독립군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는 데 있다.


이장녕,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다

이장녕은 1881년 5월 20일 충남 목천면에서 부 이병삼과 고령 안동 권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3기생으로 입학해 졸업한 후, 1903년 3월 25일 육군 참위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친위대 제1대대 견습으로 본격적인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1907년 군대 해산으로 군복을 벗고 낙향하였다.      

이후 그의 8촌 형 석오 이동녕과 협의해 신민회의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이라는 큰 명제 하에서 집안의 이주를 주도하였다. 1907년 11월 20일 고향 천안 목천을 떠나 일가족이 만주로 이동해 유하현에 자리를 잡았다. 김대락의 『백하일기』에는 이장녕의 부친 이병삼이 김대락 일가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백하일기』 1911년 2월 13일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온 소 한 마리가 일꾼도 없고 짚과 겨도 없어서 전혀 기를 대책이 없는지라, 부득이 염치를 무릅쓰고 이병삼의 집으로 보냈다. 이형이 전에 집 아이에게 나를 위해 대신 길러주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이형이 이리저리 돌보았고 염려해줌이 지극하여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


『백하일기』에 이병삼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11년 2월 9일부터이다. 김대락은 이병삼을 많이 의지한 것 같다. 그가 찾아오면 반갑게 해후하였으며, 이병삼의 집에서 소를 잡아 나누어 준 일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장녕이 김대락의 아들 월송 김형식에게 보낸 편지를 이병삼이 전달하려고 김대락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병삼은 김대락과 대소사를 함께 의논했던 것 같다. 이장녕은 신흥무관학교의 교관 및 학도단장을 거쳐 교장 대리까지 역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 등으로 국제 정세가 긴박하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장녕은 조성환, 이동녕 등과 함께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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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좌) / 이동녕(우)


청산리대첩에 참여하다

이장녕은 1919년 4월 한족회가 조직된 후 군정서를 설치하면서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장녕이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 직책도 군사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가 군정서의 간부 역할을 역임하면서 신흥무관학교의 교장 역할도 동시에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일이 총재로 있었던 북로군정서에서 무관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세웠는데, 이때 필요한 인물을 서로군정서에 요청하였다. 그때 선발된 인물이 이장녕이었다. 이우석의 『수기』에 의하면 이장녕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었던 백종렬과 강화린을 대동하고 대한군정서를 향해 떠났다. 그 시기가 1920년 4월이다. 이우석의 『수기』에는 이장녕이 서간도에서 북간도로 파견된 경로가 표현되어 있다.


신흥학교 졸업생 중 백종열, 강화린 두 청년은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같이 가게 되었다. 나는 연성소에 들어가려고 같이 가는 길인데 군사학 책자 30여권을 짊어지고 간다. 일행 6명은 화전현을 거쳐 안도현 지경을 들어섰다. 송화강을 따라 산으로 산으로 들어간다. 그야말로 신비의 백두산을 오른다.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는 1920년 3월에 개교하여 그해 8월에 1기생 속성 과정이 완료되었다. 따라서 이장녕은 늦어도 제1기생 졸업 이전에 도착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로군정서와의 연결은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과 교유가 있었던 김좌진을 통해 이루어졌다. 대한군정서의 참모장을 맡았던 이장녕은 먼저 군사훈련과 무기 수급에 전력을 다했다. 군대를 무장하지 않은 채 일제와 겨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장녕은 무기 구입을 위해 연해주로 직접 갔다. 체코제 무기를 안전하게 구입하여 대한군정서 대원들을 무장시킨 이장녕은 왕청현 십리평에 세워진 사관연성소의 교관을 맡으면서 실전에 대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대한군정서에는 참모장 이장녕, 학도단장 박영희, 종군장교 김훈 등 서로군정서 출신들이 충원되었다. 사관연성소에서는 군사학, 총검술 등을 교수하였으며, 축성교범 등의 교재도 인쇄하여 사용하였다.청산리전투에서 이장녕은 대한군정서 대원들의 제복을 직접 제작했는데,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제복에 근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전투에서 이장녕은 서일과 함께 대민업무와 군수 및 정보 수집 업무를 담당했다. 따라서 이장녕은 청산리전투에서 민간과 군수를 맡아 최전방에서 싸우는 전투부대의 후방을 든든하게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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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위부터 아래 순으로)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 졸업식(1919. 9. 9) / 신민부에서 이장녕이 참의원으로 선임되었다는 기사, 『독립신문』(1925. 5. 5.) / 청산리대첩비


그가 남긴 유산

이장녕은 1880년대 초반에 출생해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거쳐 육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나라가 망해 가는 과정을 호국의 최첨병인 군대에서 목도하였다. 하지만 1911년 중국 유하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군인의 길을 계속 걸었다. 1920년 청산리대첩에서 승리의 주역이 김좌진과 홍범도라면, 숨은 주역은 이장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로군정서의 교관으로 있던 이장녕이 대한군정서에 파견되면서 두 단체의 긴밀한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으며, 이것이 청산리대첩의 승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군인의 길을 계속 이어가던 이장녕은 1920년대에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물론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인적 자원의 수급 차원에서 이장녕은 진정한 군인이면서 민족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러다가 만주사변 다음 해인 1932년 1월, 중국 마적의 피습을 받고 순국하면서 독립운동 역시 멈추었다. 그의 두 아들 가운데 큰아들 이의복은 독립운동가였으며, 둘째 아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대를 이어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한 그의 가문은 진정한 애국 가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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