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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만주지역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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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주용(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일반 사람들에게 독립군이란 고난과 열정의 화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독립운동은 조국을 위해 나를 버리는 길이다. 그만큼 독립군에게는 고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독립군은 중단 없이 맥을 이었고, 그 전통은 광복 때까지 지속되었다.


만주에 민족학교를 세우다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과 비용이었다. 자금과 인적 자원은 독립군 조직을 지탱하는 두 축이자 키워드와 같았다. 특히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가 추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이와 병행해서 군자금을 모집해야 했다.     

만주지역의 독립군 단체는 냉정히 말하면 비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다. 비정규군의 인적 자원은 정규군에 비해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인력 수급도 부정기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대안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또한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민족학교는 1920년대 무장독립투쟁의 현장을 누볐던 인재들을 1910년대 착실하게 키워냈던 군관학교의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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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창고에서 시작한 신흥강습소 옛 터(좌) /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우)


신흥무관학교 문을 열다

1911년 6월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토착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시작된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신’ 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라는 의미의 ‘흥’ 자를 합한 것으로 나라를 새로 일어나게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초기 신흥강습소 학생은 40여 명이었다. 추가가 신흥무관학교 교장은 이철영과 이동녕이었으며, 본과 또는 원반과 군사학을 전수하는 특별반으로 나누어졌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등 6형제와 안동의 이상룡, 김동삼 등을 비롯한 명망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들은 사회 지도층으로서 모든 기득권과 영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사실은 한국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신흥강습소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신흥강습소는 날로 늘어나는 학생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련된 곳이 바로 합니하였다. 1912년 7월, 천연의 요새인 합니하에서 낙성식을 거행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과 중등교육 과정을 가르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학교였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비용은 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유원의 양자인 이석영이 부담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요새지로써 군사훈련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학교 소재지는 광화에서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큰 병영사가 세워졌고 각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있었으며, 생활관 내부에는 사무실·숙직실·편집실·식당 등이 갖추어졌고, 낭하에는 총가가 설치되었다. 교사로는 여준, 김창환 등이 활동하였다. 당시 생도는 100여 명이었으며, 졸업생도 한기에 수십 명씩 배출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중등 과정은 3년이 기한이었고, 군사과는 1년 과정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군사교육 훈련에서 기존 사관학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주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교관을 담당하였으며, 기본 교육 과정은 대한제국기와 비슷했다.      

여기서 잠시 대한제국기 육군무관학교의 교과목과 군사 훈련 상황을 1기생 황학수의 눈을 통해 살펴보자. 술과로는 각개 훈련과 기초훈련, 체육을 중시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군사시설과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어 도수훈련과 체력단련, 야간 강행군 등 훈련에 집중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원병상의 일기에 나타난 고된 일과를 보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조국애가 얼마나 강렬한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이들의 당시 식사는 중국인들이 창고에서 수년간 보관하고 있던 좁쌀로 만든 밥이었다. 꺼칠한 좁쌀밥과 반찬이라고는 콩장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식생활을 가늠해볼 수 있다.


새벽 6시에 기상나팔 소리 또-또-따. 잠든 생도들의 귓전을 울리면서 각 내무반의 생도들은 일제히 일어나 신변 환경을 정리하고 3분 이내에 복장을 단정히 하고, 각반 치고 검사장에 뛰어나가 인원 검사를 받은 다음 보건 체조를 한다.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이 초모자를 쓰고 홑옷 입고 나와서 점검하고 체조를 시키면서도, 그 활기찬 목소리에 그 늠름한 기상과 뜨거운 정성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 체조가 끝나고 청소와 세면을 마치면 각 내무반 별로 취식 나팔 소리에 따라 식탁에 나가 둘러앉는다.

원병상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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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근대적 군사지식 보급과 신흥교우보를 발행하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더 강하게 조직하고 단련하기 위한 외곽단체 ‘신흥학우단’을 창단하였다. 본래는 1913년 5월 6일에 합니하 신흥무관학교에서 신흥교우단(학우단)으로 출발하였다. 신흥교우단은 조직 후 기관지 『신흥교우보』를 발행했다. 기관지 발행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널리 홍보하는 데 필수적 요소였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던 사실, 권업회에서 『권업신문』을 발행한 사실 등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동안 『신흥교우보』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학생들로 조직된 신흥교우단에서 발행했다고 알려졌을 뿐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10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미주지역 자료 기증을 펼칠 때 지금까지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던 신흥교우보를 미국 교포로부터 기증받았다. 『신흥교우보』 제2호가 세상에 나오면서 몇 가지 추측으로만 여겨졌던 새로운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신흥교우단의 규칙 기초위원에는 이규준과 강일수가 피선되어, 규칙의 초안을 만들고 강령을 정했다. 각종 간행물을 통해 혁명 이념의 선전과 독립사상을 고취한다는 취지 아래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신흥교우보』의 발행으로 이어졌다. 5월 10일 제1회 임시총회에서 해마다 2회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한 규정은, 5월 25일 개최된 제2회 임시총회에서 연 4회 발행하기로 개정되었다.     

한편 신흥교우단은 새로운 조직 체계를 운영하기 위해 1913년 8월 14일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운동부·조사부·토론부·재정부를 두었으며, 운동부원 2명을 선정하고 편집부원 2명을 가선한 뒤 편집부 회계 1인과 교정원 2인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토요일마다 교우단의 발전을 위해 토론회가 열렸으며, 학술 이론과 투쟁의식에 대한 웅변도 할 수 있었다. 또 선열의 시범과 단시 및 단가 등을 낭독하고 애창하였다. 이들이 뜨겁게 외쳤던 선열의 시범과 단시 및 단가는 합니하의 골짜기에 우렁차게 메아리쳤다.     

이처럼 신흥교우단은 만주지역에서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자위체로서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동들에게 초등교육을, 청년들에게는 군사교육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신흥교우보』를 통한 선전활동에 있었다. 서간도지역 한인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생활 터전인 삼원포에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로 조직된 신흥교우단. 이들은 혁명 이념의 선전과 학술 연구와 정신 연마를 고취시키고 일선 투사들의 투지를 앙양하기 위하여 단보 발행에 노력하였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찾기 위해 신흥무관학교에서 활동했던 이들의 활동을 1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에 대한 책무이자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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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서농장(좌) / 신흥무관학교 교사 및 학생들의 영농 장면(1915)(우)


신흥교우단의 강령

다물의 원동력인 모교의 정신을 후인에게 전수하자.

겨레의 활력소인 모교의 전통을 올바르게 자손만대에 살린다.

선열 단우의 최후 유촉을 정중히 받들어 힘써 실행한다. 


신흥교우단 선열의 시범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몸을 바쳤노라.

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를 잊었노라.

나는 뒤의 일을 겨레에게 맡기노라.

너는 나를 따라 국가와 겨레를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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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교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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