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6·25전쟁 또 하나의 아픔

조선의용군 참전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35년 만에 맞이하였다. 그런데 외세의 억압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우리 민족끼리의 다툼이 벌어졌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지만, 이내 38선에 가로막혀 남북으로 나뉘었고 얼마 뒤 각기 다른 정부가 세워졌나 싶었는데, 2년도 채 안 돼 전쟁이 일어났다. 후삼국이 통일하던 시기에 벌어진 민족 간 다툼 이후 천여 년 만의 일이었다. 


일본군과 항전하던 조선의용군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광복 이후 몇 안 되었던 산업 기반이 무너졌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적지 않은 고아와 미망인이 생겨났다. 어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으로 끌려갔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으로 입대하였고, 그 뒤 미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종전 후에 국군이 되기도 했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아픔은 1938년 10월 일본군과 일전을 치르기 위해 결성한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6·25전쟁 당시 북한군으로 참전하여 동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것이다. 

조선의용대는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에 의해 창설한 독립군 부대였다. 처음에는 200여 명에 불과하였는데, 1940년 초에는 30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 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이 확전하면서 많은 활동을 펼쳤는데, 이후 두 갈래의 노선으로 나누어졌다. 대다수는 1941년 6월 중국공산당이 활동하던 화북 팔로군 지역으로 북상했고, 80여 명의 잔여 대원들만이 김원봉을 따라 충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였다. 화북행을 택한 대원들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의 후방 지원 역할보다는 일본군과 직접 싸우고자 만주로 향하고자 한 것이다. 김두봉·한빈·윤세주·박효삼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북상한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 팔로군 산하에 합류하였고, 지대장 박효삼의 지휘로 타이항산(太行山, 태항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이때 김원봉의 절친이자 동지였던 윤세주가 타이항산 전투에서 희생되어 지금 중국의 하북성 한단시 진기로예 열사능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는 일본군에 포위된 팔로군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군과 일전을 치르다 전사하였다. 오늘날에도 조선의용대가 활동하였던 화북 일대에는 조선의용대의 여러 유적이 남아 있으며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이 이를 기리고 있다. 

그 뒤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 부대를 확충하여 대중을 조직하였다. 이외에도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얼마 뒤 조선독립동맹이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으로 이동하자, 1944년 초 팔로군과 함께 타이항산 곳곳에서 일본군과 항전하던 조선의용군도 그 뒤를 따랐다. 이때 많은 한인 청년들이 모여들어 1945년 5월에 조선의용군 총수는 850여 명에 달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뒤 한 달쯤 지나 팔로군으로 편성된 동북 정진군이 만주로 이동할 때 조선의용군도 이들과 함께 옌안을 떠났다. 그들 중 일부는 북한으로 들어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북한으로 들어간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한빈 등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해 활동하였다. 이들은 북한 내에서 옌안(延安, 연안)파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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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탄섬 마리바고 지역에 자리한 리조트

동족을 상대로 전쟁에 나서다

한편 만주에 머무른 조선의용군은 그곳에서 동포들을 모병해 부대를 증강하고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에 참가하였다.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이 화평교섭회담을 갖기도 하였지만, 두 세력은 치열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1947년 말부터는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국민당은 공산당에 밀리게 되었고 이를 기회로 중공군은 총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동북인민해방군 보병 제166사단으로, 제3지대는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보병 제164사단으로, 제5지대는 동북한일연군 교도려와 합치며 인민해방군 중남군구 독립 제15사단이 되었다. 이들의 주 임무는 만주 주둔 국민당 군대를 소탕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 적지 않은 공적과 경험을 쌓았다. 또한 이들은 농번기에 김매기나 밭갈이를 돕거나 가을에는 추수를 거두는 등 농민들을 돕기도 하였다. 

1948년 11월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군이 주둔하고 있던 선양(瀋陽, 심양)을 함락한 뒤에 만주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넘어 관내로 이동하였다. 이때 남침 야욕을 가졌던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조선인 부대의 인도를 요청했고 대원들 또한 귀국을 원했다. 이에 1949년 5월 중국공산당은 이를 약속했고,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그해 7월 조선의용군과 국공내전에 참전하였던 조선군을 포함한 만주 조선인 부대 6만여 명이 북한으로 입국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조국이 38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는 현실을 엄중하게 받아들였고, 조국으로 돌아가 ‘조선 해방’을 꿈꾸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선인으로서의 국적을 회복하고 조선노동당 당적을 갖게 되었으며, 조선인민군 제6, 5, 12사단으로 편제되어 북한군의 근간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38선에서 남침한 보병 21개 연대 가운데 47%인 10개 연대가 만주의 조선인 부대였다. 이들은 중국의 국공내전 당시 공산군의 선두에 서서 돌격로를 개척하고 전투의 대세를 결정할 정도로 전투 경험과 전투력이 상당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김일성이 남침하지 못했을 것이라 하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 출신 200여 명이 참전하였다는 사실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일본군을 토벌하는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중국공산당 편에서 국민당과 싸웠으며 마지막에는 동족을 상대로 전쟁에 나섰으니 역사의 큰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6·25전쟁의 또 하나의 아픔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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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탄섬 마리바고 지역에 자리한 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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