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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립의학교 학생과 의사들의 항일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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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상익(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19세기 의학의 교황이라고 일컫는 독일의 루돌프 피르호는 말하였다. “의학은 사회과학으로서 또 인간학으로서,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리는 요인을 밝혀내고 해결해야 할 책무가 있다. 의사는 빈민과 약자들의 대리인이자 변호인이다.” 진정한 의사라면 인간의 건강을 해치고 질병 발생을 유발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조건들을 개선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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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과대학인 의학교와 교장 지석영         


일제에 의한 근대의료 보급의 실상

일제가 강점기 동안 한국에 근대의료를 보급한 것은 철저히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고, 한국인들에게 돌아간 혜택은 매우 미미하였다. 부당한 경비와 수혜를 견주어보면 한국인들로서는 터무니없이 손해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가난한 한국인들을 수탈하여 일본인들의 건강을 돌본 셈이었다.

일제는 자신들이 처음으로 조선에 근대의료를 도입한 양 강변했지만, 조선은 이미 1870년대 후반부터 근대서양식 의료를 독자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었다. 근대의료 도입 이전에 일제의 식민지가 된 타이완과는 뚜렷이 다른 점이다. 지석영 등 선각적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시작된 우두 보급이 머지않아 국가사업으로 확대되었고, 1885년 근대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하고 서양인 의사들을 고용해 운영하였으며, 1899년에는 여러 차례의 좌절 끝에 최초의 근대식 의과대학인 의학교를 세워 의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외세 침탈이라는 험난한 역경 속에서도 의료의 자주적 근대화를 향한 노력은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을사늑약 직후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의 보건의료 권한을 강탈하기 위하여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진두지휘로 대한의원을 설립하였다. 일본인들로만 구성된 창설준비위원회는 법령 제정부터 건축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리고 창설위원들은 대한의원이 설립되자마자 핵심부서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대한의원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의료를 장악하였다. 대한의원 건립 비용은 당시 대한제국 정부 1년 총예산의 2%에 해당하는 40만 원의 거액으로 대부분 일본차관이었다. 그 시기는 일본에 진 빚 때문에라도 나라가 패망한다고 민간에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이던 때였다. 그러한 민중들의 애국운동을 능멸하듯이 이완용 등 매국노 대신들은 일제를 위해 보상운동 총 모금액의 2배가 넘는 새로운 일본차관을 얻었다. 그렇게 세워진 대한의원의 의사를 비롯한 직원도 환자도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의원을 세운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일제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서유럽 식민지들과는 달리 한반도를 일본인들이 실제로 많이 거주하는 곳, 글자 그대로 ‘식민지’로 만들려 하였다. 그러려면 일본인들이 별 걱정 없이 이주할 여건을 만들어야 했고, 무엇보다도 일본인들을 위한 최신식 병원을 세워야 했다. 노회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정부가 거액의 일본차관을 들여와 일본인 이주자와 식민통치를 위한 최상급 의료기관을 짓게 함으로써 거뜬히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면서도 겉으로 내건 명분은 ‘대한제국의 의료 발달’과 ‘문명개화’였다. 이러한 기만적 통치로 한국인들은 의료에서 오히려 점점 더 소외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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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 세워져 1886년에 구리개(을지로)로 옮긴 뒤의 제중원(좌) / 『황성신문』 국문연구회 조직 기사(1907. 2. 6.)(우)       


의학교 교원들과 학생들의 항일운동

한국근대의학의 원류인 의학교는 1899년부터 1907년까지 불과 8년 동안 존속한 학교지만, 1870년대 이래 의학의 자주적 근대화를 지향한 선각자들과 민중의 열망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했기에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전통이 세워질 수 있었다.

1907년은 민족의 운명을 가름한 중차대한 시기였다. 일제의 침탈이 더욱 거세지던 이때 정재홍 의사의 의거가 일어났다. 정재홍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결하였다. 

정재홍이 분사한 다음날부터 의연금 모집 운동이 벌어졌다. 겉으로는 정재홍의 유족에게 성금을 모아주는 것이었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이었다. 따라서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금의 발기인 14명 가운데 의학교의 핵심 멤버들인 김익남, 지석영, 유병필 등 의료인이 4명이나 되었다.

한편 최초의 한글단체인 국문연구회는 지석영의 주도로 1907년 2월 1일에 창설되었다. 국문연구회에는 윤효정, 박은식, 이종일, 양기탁 등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 다수가 참여하였다. 사무실은 의학교에 두었으며 실무 역할은 지석영, 전용규 등 의학교 교원과 주시경이 담당하였다. 요컨대 의학교는 한글 연구의 산실이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황제마저 갈아치우는 절대 권력자 이토 히로부미는 의학교와 한국 민중들의 자주적 의료 근대화 노력을 짓밟으며 대한의원을 설립하였다. 그렇다고 의학생들의 자주독립의식과 기개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지 두 달 뒤인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의사가 친일 매국노 이완용의 척살을 시도했지만 중상을 입히는 데 그쳐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의거로 한민족의 의지를 만방에 드러내었고, 매국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는 점에서는 목적을 십분 달성하였다.

당시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학생 오복원은 자금 조달을 맡고, 김용문은 이완용의 동정 파악을 하는 등 이재명의 거사에 함께하였다. 의거에 대한 일제의 보복으로 이재명 의사는 1910년 9월 3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고, 오복원은 징역 10년, 김용문은 징역 7년형을 받았다. 통감부의 첩보 자료에는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얼빈 거주 동포들의 반응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재명은 조국의 수도, 그것도 일본인 순사와 헌병이 배치되어 있는 곳에서 큰일을 이루었으므로 처음부터 생환을 기대하지 않은 결사의 행동이었다. 그 용맹함이 안중근보다 훨씬 높으니 안중근을 뛰어넘는 일등공신이 나왔다고 칭찬하고 있다.”


3·1운동과 의학생들의 활약

1919년은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난 해이고, 투쟁의 소중한 결실로 대한민국이 건립된 해이다. 3·1운동에서 학생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실제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운동을 거족적으로 확대·발전시킨 것은 민족 대표들이 아니라 학생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의학교의 전통을 이어받는다고 자임하는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 학생들의 역할이 가장 뚜렷했고, 그에 따라 체포·투옥·퇴학당한 사람도 가장 많았다.

1919년 말 경성의전 학생들의 상황을 보면 조선인 재학생이 141명이었고 퇴학생은 79명으로, 전체 학생 220명 중 무려 36%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경성의전 퇴학생들의 이후 행적은 일부만 알려졌을 뿐이다.

이미륵(본명 이의경)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독일로 유학을 가서 생물학박사가 되었다. 학위를 받은 뒤에는 주로 문필생활을 하여 『압록강은 흐른다』 등의 작품을 독일어로 발표하였다. 한위건 역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한때 귀국해 동아일보 정치부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30년대에는 주로 중국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을 벌였다. 

나창헌은 체포되었지만 병보석 중 탈출한 뒤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과 의료활동을 벌였다.이처럼 의학생들은 큰 희생을 치르면서 역사와 의학 앞에 떳떳할 수 있었다. 그 뒤 어떤 이들은 조국과 민족과 인간 해방 투쟁에 헌신하였다. 투쟁에 직접 뛰어들지 않은 사람들도 의사의 사회적 책무를 잊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광복 이후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한국사회와 한국의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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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왼쪽부터 오복원, 이재명, 김용문 

2 지석영이 편찬한 근대 의학적 지식을 국문으로 담아낸 『신학신설』

3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사 김익남의 동상

4 이완용 모살 미수 사건 판결문에 명기된 가담자들(1910.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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