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관

독립운동과 광복군의 대일 선전포고

『국민보』와 『태평양주보』

인문학관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국민보(國民報)』는 1913년 하와이에서 한글로 발행된 신문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독립운동과 문맹 퇴치 및 교민의 계몽활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태평양주보(The Korean Pacific Weekly)』는 1913년에 창립된 하와이 동지회의 기관지로서 임시정부 소식이나 조국의 독립, 고국의 소식 등을 보도하여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광복 이후까지 살아남은 신문

『국민보』는 1913년 8월 1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발행한 신문이다. 이 신문은 당시 미국 최대의 한인단체였던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처음에는 홍종표가 주간이었으나 박용만이 뒤를 이었고, 한때는 이승만도 제작에 참여하였다. 신문은 독립운동과 문맹 퇴치 및 조국과 교포 소식, 지식 보급, 교민 계몽 활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신문에는 1918~1919년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한 파리강화회 독립운동가들이 작성한 문서와 이들의 활동상을 담은 기사들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하와이에서 영어 이외의 모든 외국어 신문의 발행이 금지되었고, 1941년 12월 10일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던 1944년 2월 9일부터는 『국민보』가 다시 복간되면서 영문 1면을 추가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발행한 신문이 이어지지 못하고 폐간되는 반면, 『국민보』는 광복 이후 1968년 12월 25일까지 발행되어 하와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래 시에서 지은이 현순은 “독립운동을 할 당시 중국 상하이를 떠나 유럽으로 가다가 배 위에서 시를 한 수를 지었다. 나는 하와이에 다시 온 후에 미미교회를 넘고 단합회를 건너 애국단을 거치고 동맹단을 지나서 혁명당을 밟아가는 것은 오직 머리 돌려 광복하는 가을을 보고자 하는 붉은 마음으로 봉사할 따름이다”라고 시에 대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어서 “큰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적은 것을 없이 여기지 말자는 김구 선생의 말씀을 기억하자”며 동포들에게 애국심을 북돋아 주었다.


넓고 넓은 푸른 바다 / 외로운 배 따라 

비와 바람 무롭 쓰고 / 서주로 향하다

산을 넘고 물을 넘어 / 무삼 연고인가 

머리 돌려 광복 가을 / 오즉 보고 지고

「혁명」 현순 지음, 『국민보』 1828호(1944.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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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기관지『국민보』(1913)(좌) /『국민보(國民報)』(우)            

 

주권 회복을 위해 발행된 잡지 

1913년 9월 하와이에서 시사교양의 증진과 독립된 주권 회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발행한 국문으로 된 『태평양잡지』를 제호와 체제를 바꾸어 1930년 12월 13일부터 주간으로 발행하였다. 그러던 중 1942년 1월 21일 하와이에서 외국어신문의 발행을 금지하면서 한때 정간을 당하였다. 이어 『국민보』와 합동으로 『국민보-태평양주보』라는 제호로 발간하다가, 1944년 2월 2일 다시 『국민보』와 분리하여『태평양주보』로 제호를 바꾸었다. 광복 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식이나 조국의 독립 문제 등을 크게 다루었다. 


1  태산 같은 항공모함 / 비행기를 가득 실고 / 

    신비의 길로 둥실둥실 / 태평양 넘나노나

2  만리 창공 구름을 차고 / 천지진동 울려들어 / 

    번개가 치나려 치니 / 폭탄의 비 불바다 

3  황실 군부 적의 마굴 / 동경 신호 나고야 / 

    군수 공장 그 심장을 / 깨뜨릴사 적의 멸망

후렴 용감하다 정의 용사 / 오늘은 승리 일로 판쳐 / 

    최후 승리를 노래하세 / 내일은 어메리칸

「동경의 폭격」 조선 농부, 태평양주보』 1720호(1942. 4. 22.)


『태평양주보』는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중 미군의 전승 기록을 주로 실었다. 그 뒤에는 교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정보와 고국의 소식 등을 보도하였다. 이 시에서도 일본이 홍콩과 필리핀, 싱가포르를 공격하고 이어 태평양까지 점령하자 이에 맞서 미국이 처음으로 일본 도쿄를 폭격한 장쾌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1  전진 전진 나가자 우리혁명 군사야 / 기다리던 시기 

     돌아 왔도다. 창검을 빗켜 들고 용맹하게 나가셔 / 

대한 독립 자유 위해 싸우자.

2  전진 전진 나가자 우리 혁명 군사야 / 

    탄환이 빗발같이 퍼부어도 북소리와 발맞추고 

    태극기를 따라서 / 최후 일인 일각까지 싸우자

후렴 밤새도록 접전하던 혈성 / 대외 걸음이 저벅 저벅

올 때에 휘날리는 깃발은 / 우리 태극 국기가 분명하다.

「혁명군가」 안정송, 『태평양주보』 1813호(1944. 2. 23.) 


한국 광복군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 1941년 12월 9일에 대일선전포고를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1944년 8월 광복 직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한미합동 작전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때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최후 일인 일각까지 싸우자고 태평양전쟁에 참여한 애국동지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후 광복군은 한반도에 지하군을 조직하여 파괴 공작을 진행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SS)과도 협약을 맺고 특무 공작 훈련을 실시하면서 미얀마에서 영국군과 함께 공동 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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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주보(The Korean Pacific Weekly)』(좌) /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과 미국 전략사무국(OSS) 대원(1945)(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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