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민족이 단결하여 

제2의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6·10만세운동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왼쪽부터)

권오설(權五卨) / 1897~1930 / 경북 안동 / 건국훈장 독립장(2005)

이선호(李先鎬) / 1904~1950 / 경북 안동 / 건국훈장 애국장(1991)

박래원(朴來源) / 1902~1982 / 서울 / 건국훈장 애족장(2005)

이동환(李東煥) / 1901~1982 / 전북 정읍 / 건국훈장 애족장(1990)


alt

융희황제 장례 행렬           


3·1운동을 기반으로 6·10만세운동이 일어나다

6·10만세운동은 융희황제(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세력, 학생 조직이 연합하여 전개한 제2의 만세운동이다. 거사 전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지는 못하였지만 학생들은 융희황제 인산** 당일 일제 경찰의 경비망을 뚫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올해 95주년을 맞은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역사적 기반 위에서 거행된 제2의 만세운동으로, 학생이 독립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였고, 정치 이념을 초월한 민족 통합을 이룬 독립운동이었다. 


alt

「격문을 배포하려다가 검거되어」(『조선일보』 1926. 6. 10.)                      


권오설과 박래원, 이념을 초월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6·10만세운동을 계획한 조선공산당은 천도교계를 유력한 제휴 세력으로 간주하며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 방안을 모색하였다. 두 세력의 연결은 조선공산당의 권오설과 천도교청년동맹 간부 박래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권오설은 6·10만세운동 계획의 총 책임을 맡아 제휴 세력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격고문」 등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천도교계로 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 회원인 박래원에게 격문 인쇄 및 전국배포를 부탁하였다. 박래원은 부여받은 임무를 천도교 인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 격문 5만여 장을 인쇄하는 등 천도교계의 6·10만세운동 동참을 이끌었다.

그러나 거사 4일 전에 숨겨 놓은 격문이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되면서 권오설과 박래원은 각각 징역 5년형과 3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는 권오설·박래원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 독립장(권오설), 애족장(박래원)을 추서하였다.


alt

권오설 철제관_권대용 기증-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좌) / 권오설, 박래원 구류 연장 통보문(1927,  박명도 제공)(중앙) / 6·10만세운동을 진압하는 일제 경찰 (1926. 6. 10.)(우)


이선호와 이동환, 학생들이 나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권오설로부터 인산 당일 만세운동 시작의 임무를 부여받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6·10만세운동의 계획이 발각된 상황에서도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대로 추진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 이선호는 거사 당일 융희황제의 장례 행렬이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통과할 때 태극기와 격문 등을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시위를 선도하였다. 

한편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통동계*** 이동환은 각 학교에 선언문을 배포하며 시위 동참을 권유하고 거사 당일 오전 단성사 앞에서 이선호 등과 힘을 합쳐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일 오후 일제 경찰이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이선호·이동환은 현장에서 붙잡혀 각각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는 이선호·이동환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애국장(이선호), 1990년 애족장(이동환)을 추서하였다.


*  승하(昇遐) :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는 말

** 인산(因山) : 대한제국 황제 직계 가족의 장례

***통동계 :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 등 서울 지역의 각 학교 학생들이 중심된 독립운동 단체


자유를 부르짖으면 반드시 자유가 온다는 굳은 신념 

아래서 자유를 얻기 위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경성지방법원 판사 심문에 대한 이선호의 답변 중에서(1926. 11. 2.)


alt

 「거사가 양심이니 진술도 양심대로」(『동아일보』 1926. 11. 4.)_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alt
MAIN TOP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