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사진신부로 인연을 맺어 

미주지역 항일운동을 주도한  

차인재와 임치호 부부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차인재는 수원 삼일여학교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나와 교사 생활을 하다가 돌연 미국으로 건너가 임치호와 결혼을 한 뒤 함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들 부부는 미국에서 상점 등을 경영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동시에 차인재는 대한여자애국단, 임치호는 대한인국민회 등에 가입하여 왕성한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alt

차인재, 임치호 가족        


구국민단 교제부장으로 민족문제에 고민하다 

차인재(차우르다, 임인재)는 1895년 4월 26일 경기도 수원군 북부면 북수동(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에서 태어났다. 수원지역 대표적인 여성교육기관인 삼일여학교를 1910년 3월 2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최초의 여류 화가 나혜석과 동생 나지석, 박충애와 홍보배 등이 동기동창생이다. 학교는 북감리교 여선교회 스크랜튼(M.F Scranton) 선교사에 의해 보시동 수원읍 교회(현 종로감리교회)의 초가집에서 3명의 ‘삼일소학당’으로 개교하였다. 전도부인 이경숙과 유지들의 활약으로 1년 만에 재학생이 20여 명으로 늘어났다. 교장으로 부임한 밀러는 스크랜튼 대부인의 적극적인 후원과 미국 여선교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현재 학교 부지인 수원천로 350(매향동)에 이전하였다. 교장은 낙후된 학교 시설을 개선하고 4년제 삼일여학교로 정식 설립 인가를 받았다. 박충애의 어머니이자 교사인 김몌례는 민족의식 함양과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무를 일깨웠다.  

차인재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한 뒤 모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여성교육 보급에 열성적이었다. 3·1운동 이후 수원지역 민족운동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1920년 6월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선태, 이종상(일명 이득수)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체인 구국민단이 조직되었다. 목적은 크게 2대 목표로 삼았다. 첫째, 한일강제병탄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 제국 통치하에서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조직한다. 둘째,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어 있는 사람의 가족을 구조한다는 내용이었다.

임원진은 단장 박선태, 부단장 이종상, 구제부장 이선경(경기고녀), 서무부장 임효정(일명 임순남, 이화여고보), 재무부장 최문순(이화여교보), 교제부장 차인재 등이 맡았다. 특히 이 단체를 조직할 때 이선경·임효정·최문순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차인재였다. 이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신문』, 『대한민보』, 『창가집』, 「경고문」  등을 수원지역에 배포하면서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이들 대부분은 학교 기숙사나 하숙을 하는 서울 유학생이었다. 주말마다 서울에서 고향 수원으로 돌아와 금요일 밤마다 삼일학교에서 모여 장래에 대한 운동 방침을 의논하였다.


alt

이화학당 시절 차인재(아래 첫번째)            


미국에 정착하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구국민단에서 활동하던 차인재는 1920년 7월 말 갑자기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 결혼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8월에는 화성 영흥도 출신인 임치호와 결혼하면서 남편 성을 따라 임인재(林仁載)로 성을 바꾸었다. 이는 일찍이 개신교 신자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현실이었다.  

1921년 4월 7일자 『신한민보』에서 초기 생활을 어렴풋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임치호씨 부인 교육 열심〉이라는 제목으로 차인재는 캘리포니아 맥스웰에 살았다. 교포 자녀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국어(조선어)학교 교실’을 만들었다. 삼일여학교 교사로서 소중한 경험은 한글 교육을 매진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교포사회에 널리 확산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글 교육과 관련하여 외손녀 윤패트리셔(한국명 윤자영) 증언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외할머니는 매우 억척스러운 분이셨어요. 외할머니는 새크라멘토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셨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초인적인 일을 하시며 돈을 버셨지요. 그렇게 번 돈을 조국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셨어요. 제가 여덟 살 무렵에 한글교실에 다녔는데 이는 외할머니의 영향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돌아가셨습니다.”

한편 1924년 대한인국민회 맥스웰지방회 학무위원으로 선정되었고,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이 단체는 1908년 장인환·전명운에 의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 저격 의거를 계기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결과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를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를 조직하였다.이듬해 2월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에 흡수됨으로써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로 구성하기 위하여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 멕시코에도 멕시코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멕시코지방회는 국민회 북미총회 산하로 조직되었다.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로 변화되자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로서 자리매김하였다. 나아가 시베리아지방총회도 설치하고 치타·이르쿠츠크·수청 등 16개 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만주지방총회도 설립하여 8개 처에 지방회를 구성하였다.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중앙총회를 정비하고 임원을 선임하였다. 기관지로 『신한민보』를 발간하여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광복 때까지 해외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중심적인 단체로 자리매김하였다.


alt

미주 흥사단에서 활동하던 차인재(왼쪽에서 세번째)            


미주 한인사회 지도자로 활약하다

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부단장으로 선정되었다. 이 단체는 1919년 5월 18일 세크라멘토 한인부인회와 다뉴바 신한부인회의 연합 발기로 “미주 안에 있는 몇 개의 부인회가 합해 하나의 통일된 단체를 만들어 조국광복에 대한 부녀자들의 운동을 강화하자”는 통고문을 발표하였다. 이후 각 지방 부인회 대표자들이 모여 합동 결의안을 채택함으로 대한여자애국단이 탄생하였다. 목적은 “대한 여자를 단결하고 문명 준칙과 도덕원리에 기인해 개인으로부터 가정에, 가정으로부터 사회로의 개량을 힘쓰며 대한 독립의 기초적 역량을 준비함”에 두었다.

주요 사업은 독립운동의 후원으로 외교선전, 군사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500달러 송금) 등에 후원금을 전달하였다. 한인 자녀들 민족정체성을 일깨우기 위한 한글교육과 대한인국민회를 후원하였다. 구제사업으로 국내에 한재와 수재가 있을 경우 구제금을 보냈다. 해방 후에는 재미한인전후구제회와 함께 구제품을 수합해 본국에 보내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1934년 8월에는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1935년부터 로스앤젤레스 삼일국어학교 재정모금 수전위원이 되어 학교 유지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서기와 재무와 로스앤젤레스여자청년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이듬해에는 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서기로 선임되어 1942년까지 활동하였다. 1939년 6월에는 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집행위원과 총무로 선임되었다. 1941년 로스앤젤레스 지방회 집행위원 겸 교육위원으로 선임되어 2년간 활동하였다. 이듬해에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 다음해에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집행위원 겸 총무로 선임되었다.

1944년 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주최한 임시회의에 애국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해 4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선전과장, 1944년 9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제6차 회의에 참석하여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문제를 논의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위한 전체 대표회를 개최하자,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5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위원,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총무, 연합위원회 군자금 모집위원으로 선임되었다.차인재는 국민회를 은퇴한 뒤 말년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내다가 1971년 4월 7일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

차인재, 임치호 부부 무덤(로즈데일리)         


미국에서 자수성가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임치호

임치호는 경기도 남양군 대부면 영흥도(현 화성시 영흥도)에서 1880년 태어났다. 20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공립협회에서 1906년 12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1907년 12월경 솔트레이크시티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3월 공립협회가 기관지 『공립신보』를 1인당 10부씩 한국에 발송하자는 제의에 동참하는 한편, 식자기계 구입을 위해 금화 75원을 쾌척하였다. 같은 해 7월 핸포드지방회를 설립하였고, 10월에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 발기인이 되었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공립협회가 블라디보스토크 등 원동지역에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자본을 모집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다. 1909년 2월에 공립협회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을 이루고 국민회가 창립되면서 태동실업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바꾸었다. 이 회사는 정재관·이상설·김성무 등을 원동지역으로 파견하였다. 봉밀산지역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으로서 항카호(興凱湖) 근처에 위치하여 수자원이 풍부한 곳이었다. 투자금으로 가옥 건설과 도로 설비와 농업경영에 필요한 농기구 등을 마련하였다. 토지 개척사업은 현지 중국인으로부터 임대한 토지와 필요한 용구를 갖추고 농업경작에 착수했으나 마적의 행패가 심하여 안정을 얻을 수 없었다. 개인 사유지가 아닌 국유지를 구매하였고 한편 귀화하지 않은 한인들은 토지 소유권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1909년 12월 와이오밍주 그린리버에 거주하며 그곳 한인들과 국민회 임시 파출소를 설립하고 사무원이 되었다. 파출소는 지방회보다 작은 단위의 조직으로 솔트레이크시트지방회 산하에 소속되었다. 1911년 6월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의 한인소년병학교의 하기 군사훈련에 참여하였다. 1918년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식자기계채 청장 동맹자를 모집하자, 그해 5월 6회 동맹자로 가입하였다.

1920년 7월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한인비행가양성소를 설립하고 양성소 간사로 활동하였다. 레드우드비행학교에 오림하·이용선·이초·한장호·이용근·장병훈 등 6명의 단우가 입교하였다. 5만 달러를 후원한 김종림(총재), 신광희(재무), 강영문(서기), 곽림대(감독) 등이 주축이 되어 윌로우스한인비행가양성소를 창립하였다. 최능익·이초·임초 등은 조종사 훈련을 받았고, 임치호·마춘봉·이암 등이 간사로 봉사하였다. 이 비행학교는 1921년 4월에 문을 닫았으나 30여 명의 조종사를 배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용근을 한국독립군 육군 비행병 참의(소위)로 임관하였다. 1920년 8월에는 차인재와 결혼한 후 이듬해 맥스웰지방회, 1923년에는 동 지방회 법무, 다음 해 재무로 활동하였다.

1932년 5월 대한인국민회에서 상하이사변 임시위원부를 설치하고 각지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자, 남부 캘리포니아주 수전위원으로 선정되어 모금운동에 앞장섰다. 1934년 흥사단에 입단하여 제281단우가 되었다. 1935년과 1936년 2년 연속 로스앤젤레스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자 3.1절 기념식을 주관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삼일국어학교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5월 국민회 주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재미한인사회 발전책 간담회에 남가주 대표로 참석하여 한인 1세 노인의 구제, 2세 청년의 단결과 교양,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 등을 논의하였다. 1937년 동 지방회 집행위원, 1940년 학무위원이 되었다. 1940년 6월 동 지방회 교육위원으로 삼일국어학교 하령회에 참석하여 2세들의 한글교육에 노력하는 동시에 1942년에는 동 지방회 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총회 간부로도 일하였다. 1941년 총회 중앙집행위원 겸 교육위원으로 선정되었고, 1942년 후보집행위원, 1943년 중앙집행위원 겸 구제위원, 1945년 중앙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MAIN TOP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