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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앞장선 의학도들

김형기와 유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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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상익(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3·1운동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삶과 사상 및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물며 20대 초반에 이 역사적·거족적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김형기와 유상규에게 3·1운동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은 새삼 물을 필요도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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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뒤로 유상규, 전재순, 김복형(오른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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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기         


의술 펼쳐 독립운동 지원한 3·1운동의 주역 김형기

김형기는 3·1운동 당시 졸업을 눈앞에 둔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 학생이었다. 당시 입학은 4월 초, 졸업은 3월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학생운동이 준비되던 초기부터 경성의전 대표로 참여하였고, 3월 1일 당일에도 시위를 이끌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김형기는 일제와 언론매체 등에 의해 전체 학생들의 대표로 간주되었으며, 징역 1년형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1년 6개월 동안 수형생활을 하고 1920년 8월 30일에 석방되었다. 그는 3·1운동에 관련된 학생으로는 가장 오래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복학을 허락받은 그는 1921년 3월경 졸업시험을 치른 뒤 졸업을 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해서 총독부의원에서 1년가량 수련을 받았다. 이후 1928년에 부산에서 동산의원을 열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의료 활동을 통해 모은 재산으로 의열단 등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였다. 

김형기는 1930년 봄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한번 체포되었다. 사건 관계자들이 김약수, 채규항, 김단야 등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인 것으로 보아 공산당 계열의 결사체로 추측된다. 동아일보 1930년 4월 2일자 기사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된 모 비밀결사 사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기미운동 당시에 의학전문학교 대표로 맹렬한 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복역하고 나온 후에 동래 울산 기장 등지에서 병원을 내고 있다가 최근에는 부산으로 옮기어 동산의원이라는 병원을 차리고 일반의 환영을 받던 김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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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기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카드(좌) / 김형기 이하 의사 209명이 체포되었다는  『독립신문』 기사(1919. 9. 16.)(우)


이 사건의 주역인 김약수는 광복 이후 보수적인 한민당에 관여하는 등 좌익 활동과는 손을 끊었고,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김형기가 적극 후원한 것으로 보아 광복 이후 김형기의 정치노선도 짐작할 수 있다.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된 김약수는 반민특위 강제 해체 무렵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6·25 때 북으로 가게 되었다.

광복 이후 김형기는 계속 의사생활을 하는 한편 정치·사회·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치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재정적으로 도왔던 의열단 김원봉과 노선을 함께해 민족혁명당(1947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 부산경남지역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남로당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공안당국에서도 김형기를 크게 주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49년 12월 부산지역에 보도연맹이 결성되었을 때는 남지구연맹 간사로 이름을 올렸고, 6·25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9일 정치공작으로 악명 높던 부산지구 특무대(본부장 김창룡)에 체포되어 얼마 뒤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극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사체조차 찾지 못한 가운데, 한참 뒤 후손들이 시신 없는 허묘(虛墓)만 세웠을 뿐이다.

최천택을 비롯하여 김형기의 측근 인물들도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에 헌신했고, 의열단과 가까운 사람이 많았다. 김형기의 사위 박일형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부인인 박차정의 숙부이기도 했다. 이들 역시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이어 해방된 조국에서도 심한 고초를 겪었다.

김형기의 사망 일시와 장소 등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9년 보고서 중 ‘부산·사천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보면 사망의 경위와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진실화해위원회는 부산·사천 사건을 국가에 의한 불법적 집단학살사건으로 결정했는데, 김형기도 그 학살 때 목숨을 빼앗긴 것으로 판단된다. 김형기는 천만다행으로 1990년 3·1운동 유공자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음으로써 억울함을 부분적으로나마 풀었지만, 정확한 사망 경위 등은 새로 구성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규명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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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규         

  

안창호의 영원한 측근 유상규

3·1운동 당시 유상규의 활동을 알려주는 문서 등 직접적인 기록은 없고 경성의전 동급생인 소설가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짐작건대, 유상규는 학생지도부의 결정과 지시사항을 경성의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곧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는 1920년 2월 27일자 일기에 “내가 이곳에 온 처음부터 두 청년(유상규, 김복형)이 나를 도왔으니”라고 적었다. 기록이 맞는다면 유상규는 안창호가 상하이에 도착한 1919년 5월 25일 이전부터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 무렵부터 안창호의 최측근으로 활동한 것이다. 유상규는 안창호를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때부터 1923년 6월까지 4년 동안 안창호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으며, 이런 신뢰는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또한 유상규는 흥사단의 입단 허락을 받아 예비단우 과정을 거친 뒤 1920년 9월 9일 단우가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경부터 노선 대립과 계파 간의 갈등을 겪은 끝에 결국 분열하고 만다. 안창호의 주도로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분열을 극복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 심한 갈등만을 남기게 되었고, 안창호 계열도 상하이를 떠나게 된다. 이때 유상규는 조선으로 돌아가 의학 공부를 마치라는 안창호의 권유를 받아들여 일본에서 8개월 동안의 노동자 생활을 경험한 뒤 경성의전에 복학하여 1927년에 졸업을 하고 의사면허를 받았다.

유상규는 졸업 후 총독부의원 외과에서 1년 8개월 동안 수련 생활을 하고, 1928년 11월 경성의전 부속병원이 개원하자 입학 동기이기도 한 백인제의 조수가 되었다. 백인제 역시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퇴학당했으며 후에 백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1932년부터는 외과 강사로 백인제 외과교실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30년부터는 경성제국대학 약리학 교실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였고, 바야흐로 학위 취득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그러던 1936년 7월 중순 감염증에 걸린 유상규는 백인제의 극진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아까운 생을 마감한다. 

7월 20일 경복궁 앞 소격동의 경성의전 부속병원에서 엄수된 장례식은 공식적인 학교장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조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안창호는 아들 같은 제자이자 동반자인 유상규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연락을 받은 즉시 평양에서 달려왔다.

유상규는 여러 잡지와 신문에 많은 글을 발표한 덕분에 그의 다양한 관심, 개방적인 사고, 계몽운동가로서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의사로서의 유상규의 활약도 중요하지만, 흥사단과 동우회 활동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이 활동들은 물론 안창호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안창호와 유상규에게는 각각 많은 동지와 친우들이 있었지만 그 둘은 20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각별한 사이였다.

1938년 3월, 안창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을 망우리 공동묘지의 유상규 곁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유상규와 안창호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안창호의 시신이 도산공원으로 이장된 1973년까지 나란히 누워 사제의 정과 동지의 의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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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안창호와 유상규,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창립 기념(1920) / 백인제와 유상규 / 안창호의 유언, 『삼천리』 제10권 제5호(1938.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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