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무기를 통해 본 전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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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내주(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전쟁의 역사를 지나왔다. 특히 우리나라는 과거 수많은 외침을 당해 왔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아픔도 경험하였다. 사람들은 승전(勝戰)해서 상대방에게 내 의지를 강요하거나 필요시 적의 영토나 소유물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이때 상대보다 우수한 장비로 무장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쪽이 이길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무기는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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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사를 들고 전진하는 그리스 팔랑크스 병사들             

  

사람과 동물의 힘으로 무기를 사용하다

13세기경 화약이 전장에 등장하기 이전에 인류가 사용한 전쟁의 도구는 일명 근력무기로, 창·칼·방패와 같은 보병무기가 주류였다. 서양 고대 그리스 시대의 주무기는 마케도니아군이 사용한 ‘사리사’라고 불린 길이 약 3~5m의 긴 창이었다. 이것이 로마시대에는 ‘글래디우스’라는 약 70cm의 짧은 검으로 대체되었다. 병사들은 왼손에 방패를 들고 자신과 바로 옆의 동료를 보호하고, 오른손에는 핵심 무기를 움켜지고 전투에 참여하였다.

근력무기가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대형을 이루어 팀플레이로 대응해야 했다. 그리스인들은 중무장한 보병들이 사각형의 대형(일명 팔랑크스)을 이루어 긴 창을 앞으로 내민 채 적군을 향해 전진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였다. 로마인들의 경우 근본적으로는 그리스의 것을 수용했으나, 이를 작은 규모의 다양한 사각형 대형으로 세분화해 융통성 있게 운용하였다. 주무기가 장창이 아닌 단검이기 때문에 팔랑크스 내 병사들의 간격을 보다 넓게 유지하는 것이 무기의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실용적인 군대 편성 및 효율적 운용을 토대로 로마제국은 고대 서양세계를 장기간 제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 천하무적이던 (서)로마제국의 위세도 4세기 이래 시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전장의 주력도 점차 보병에서 기병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흔히 중세라고 부르는 5~14세기에 유럽의 전장을 지배한 것은 바로 말 등에 올라탄 기사 계급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인간이 말 등에 올라탄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는 영화 〈십계〉에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 꾸준한 종자 개량을 통해 말의 몸집이 커지면서 드디어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 유목민들이 승마에 성공하였다. 

주무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기병의 주 역할은 기동력 발휘였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래 기병은 전투 대형 편성 시 중앙에 있는 보병부대의 좌·우측에 배치되었다. 사령관은 접전이 개시되기 이전에 기병부대로 하여금 적군의 측방이나 특히 후방을 기습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주력 부대 간의 격돌 이전에 적군을 교란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10세기경 서양에서 도입한 석궁(기계식 활)이 가공할 살상력을 발휘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병들은 무거운 철제 갑옷과 투구를 착용해 방어력을 높였다. 기병의 본래 기능인 기동성은 점차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보병 병사에 비해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중세 기사는 여전히 전력상 압도적인 우세를 점했으나, 서서히 그 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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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화승총을 발사하고 있는 병사            


화약의 힘으로 사람을 죽이다

그러던 중 중세 기사군을 몰락하게 만든 것이 화약 무기였다. 원래 화약은 중국에서 발명되어 12세기경 이슬람 세계를 통해 서양으로 전래되었다. 이후 14~15세기에 소총과 대포가 본격적으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소총의 경우 초기에는 손으로 든 채 화약에 불을 붙여서 탄환을 발사하는 형태였다. 그러다가 개머리판을 어깨에 고정한 채 방아쇠를 당겨서 화승(火繩)이라는 불심지로 화약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화승총이 발명되어 사용되었다. 기사 한 명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값비싼 말과 장비를 구비해야 하는 등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소총수의 경우 며칠 동안만 훈련하면 사격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이후 서양에서는 사격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소총을 개발해 왔다. 이른바 격발(擊發) 장치 개량에 심혈을 기울였다. 초창기 소총의 경우 재장전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점이 최대 난제로 꼽혔기 때문이다. 17세기에 이르면 심지로 점화하던 방식에서 방아쇠를 당기면 물려있는 황철광이 금속판을 강타해서 발생한 불꽃이 점화화약에 불을 붙이는 일명 수석식(燧石式) 소총으로 발전하였다. 무엇보다도 우천 시에 사용 불능이던 화승총의 단점을 보완하고 발화를 수월하게 함으로써 사격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수석식 소총 역시 사거리가 짧았고 명중률도 형편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대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횡대로 늘어선 병사들이 적군을 향해 일정한 거리까지 행진한 후 동시에 사격을 가해야만 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듯이 어깨에 소총을 걸친 양측 병사들이 가급적 근거리까지 접근해서 사격하는 방식이 거의 19세기 초중반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평소 엄정한 부대 훈련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총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일정한 대형을 유지한 채 전진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율과 군기가 유지되어야 했다. 

19세기 초반 이래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무기 발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이때 단단한 철과 양질의 화약이 발명되면서 소총과 대포의 사거리 및 살상률이 현저히 높아졌다. 19세기 후반기에 이르자, 총구 장전식에서 벗어나 오늘날처럼 탄창으로 장전하는 후장식 강선총은 물론 연속 사격이 가능한 맥심 기관총까지 등장하였다. 이로써 전장에서 밀집대형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산개대형이 대세가 됐다. 

산업화는 기술발전을 통한 화약무기의 혁신적 개량과 대량생산을 초래하였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영향은 살상용 무기보다도 철도로 대표되는 일종의 비(非) 살상용 간접 무기를 통해서였다. 그 자체로는 무해(無害)한 철도가 대규모 병력과 군수물자를 빠르게 전장으로 운송할 수 있는 수단으로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면서 바야흐로 ‘철도 시간표’ 전쟁이라고 불리는 불길한 조짐이 무르익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류는 20세기에 접어들어 두 차례나 세계대전이라는 참상을 겼었다. 결국에는 핵무기마저 등장해 세상을 무언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컴퓨터에 기초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고성능 화약무기는 물론 정밀유도무기나 로봇무기 등이 발명되어, 이른바 네트워크 전쟁이 수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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