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영국의 명예혁명

세계 산책

글 이병택(동북아역사재단)



1980년 5월 18일은 광주와 전라남도 일원에서는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며 민중항쟁이 전개된 날이다. 이와 관련해 영국 의회의 기초와 대중의 원칙을 확고히 수립하게 된 민주화 과정을 살펴본다. 이는 160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 과정이며, 왕정의 절대적인 완력 정치에 대한 영국인의 저항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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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혁명에 의해 폐위된 후 처형당한 찰스 1세          


영국 왕정의 복원

영국의 민주화 과정은 약 80년간 진행되었다. 영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왕의 목을 치거나 혹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만으로는 민주화를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정치적 타협 없이는 혼란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왕과 인민의 갈등은 1603년 잉글랜드의 국왕 제임스 1세 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1649년 제임스 1세의 왕위 계승자인 찰스 1세가 의회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청교도혁명’으로 폐위되는데, 이 사건은 영국의 민주화에 불꽃을 지피게 된다.

왕정이 망하자 영국인들은 공화정을 실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화정의 실험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사회를 묶어주던 정치적·종교적 권위가 모두 해체되고 난 뒤,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권위가 수립되지 못했던 이유였다. 이때 혼란한 정국을 틈타 찰스 1세를 참수하고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올리버 크롬웰의 1인 통치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러나 크롬웰의 완력과 정치적 수완은 시간이 갈수록 그 효력이 떨어졌고, 그의 제한되지 않은 권력은 국왕의 권력 이상으로 질서 없고 제멋대로였다. 그렇게 그가 죽고 난 뒤 영국인들은 다시 과거의 왕정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1660년 영국인들은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왕위에 복위시켰다. 그러나 왕정의 복원이 영국인들의 정치적 생활을 안정시키고 통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 차이로 인해 마침내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당파가 형성되었다. 복종을 강조하는 토리파(Tory)와 자유를 강조하는 휘그파(Whig)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엎치락뒤치락 싸움을 이어갔다. 당파 간의 싸움이 치열해지자 휘그파는 ‘교황의 음모’와 같이 허무맹랑한 사건을 조작해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처형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 휘그파의 지나침과 과격한 행동에 대해 민중이 등을 돌리면서 휘그파는 괴멸 상태에 이르게 된다. 

1685년 찰스 2세의 임종 직후 제임스 2세가 왕위에 등극하였다. 그는 형이었던 찰스 2세의 적통 계승자로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라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지만, 의회나 국교회 측의 큰 소란 없이 순조롭게 즉위하였다. 왕위 자격 논란에서 자유로워진 제임스 2세의 입지는 탄탄대로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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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혁명으로 폐위된 제임스 2세           

 

절대주의와 명예혁명

1686년 이후 제임스 2세는 자신이 의도한 정책에 거의 병적으로 집착하며 비타협의 자세를 취했다. 제임스 2세가 인민의 권리와 법을 계속해서 잠식하는 가운데, 1687년과 1688년에 재차 포고된 ‘제2차 관용령’은 제임스 2세가 급격하게 몰락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이 관용령은 모든 종교·비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당시 숨어 지내던 가톨릭 세력들에게는 자유를 주는 셈이었다. 

로마 가톨릭에 적용되어 온 형법상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이 법령은 영국인의 종교에 대한 충분한 존중을 결여한 결정으로, 의회와 국민의 반발을 사게 된다. 더욱이 제임스 2세는 관용령 포고문을 국교회 성직자들에게 낭독하도록 명령하였다. 영국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국왕대권(suspending power)을 이루고자 하는 포고문을 성직자들에게 낭독하게 하는 것은 모욕이나 같은 것이었다. 성직자들이 순응할 경우 국민에게 지탄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직자들은 인민의 존중을 붙잡고 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6명의 주교 명의로 왕에게 관용령 포고문 낭독을 고집하지 말도록 요청하는 일종의 청원서를 보낸다. 제임스 2세는 이런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재판에 회부한다. 주교들의 변호인단은 다음과 같은 논지를 전개하였고, 배심원들은 몇 시간 숙고한 끝에 무죄를 판결하였다. 


법이 정한 한도 내에서 백성은 청원에 의해 특정한 사항에 대한 그들의 고통을 국왕에게 전달하도록 허용된다. 양심에 반하는 경우에 적극적인 복종은 정부가 바랄 사항이 아니다. 백성의 순응과 복종의 위대한 잣대는 법인 것이다. 복종할 수 없는 명령이 내려질 경우 음침하고 반항적인 침묵을 택하는 것보다 거부의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더 존중받을만하다. 모두의 긴밀한 관심사인 공적인 조치에 대해서는 요청받지 않더라도 나름의 견해를 드러내는 것은 백성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다. 주교들은 순응 아니면 청원에 의해 자신들의 가부를 밝혀야 했다. 그리고 법의 효력을 정지하는 국왕대권을 부정하는 것은 선동이 아니다. 법을 따르는 제한적인 정부에서 그러한 국왕대권은 없었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러한 국왕대권이 실제로 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온 나라 사람들 앞에서 번번이 반박되었다. 누구도 그러한 국왕대권의 부정을 범죄로 처벌하자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주교들은 청원서에 있는 불복종을 인민들 앞에서 호소한 것도 아니고 국왕 전하께 몰래 전달하였다.


이후 제임스 2세는 만 3년 10개월 권좌에 머물렀는데, 이 종교 관용령을 기점으로 국교회는 집단적인 반발을 일으켰고 국민들의 반감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88년 6월 의회에서는 토리파과 휘그파의 정당 지도자가 협의한 끝에 제임스 2세의 사위인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오렌지공에게 영국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군대를 끌고 오도록 초청장을 보냈다. 윌리엄공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자 국내에 있던 귀족들도 이에 합세하였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제임스 2세는 국외로 망명하게 된다. 그렇게 제임스 2세는 1688년 12월 공식 폐위되었고, 명예혁명은 무혈혁명이란 영예를 갖게 되었다. 

인민에 의해서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까지도 왕위 승계에서 배제하는 선례는 정부의 대중적 원칙을 확고하게 수립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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