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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음악 검열과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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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문옥배(공주문화재단 대표이사)



조선총독부는 ‘노래·노래책·음반’ 등의 텍스트와 ‘공연예술인·공연장·공연제작업자·공연현장무대’ 등의 컨덱스트를 동시적으로 통제하였다. 텍스트 통제를 위해서는 사전 및 사후 검열을 하고, 컨덱스트 통제를 위해서는 ‘자격증·허가제·임검(臨監)’ 등의 방식을 취했다. 검열에 걸린 노래·노래책·음반·공연·공연장·공연예술인 등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체의 유통과 공연 행위가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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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인기 음반 윤심덕 사의 찬미(1926)(좌) / 사의 찬미 음반 속지 가사(1926)(우)


노래와 노래책의 통제

조선총독부는 1909년 2월 23일 「출판법」(법률 제6호)을 공포하였다. 출판법은 발매 반포를 목적으로 발행되는 일체의 문서와 도서를 규제 대상으로 삼고, 원고의 사전 검열과 출판물을 배포하기 전에 납본 검열을 의무 규정으로 둔 이중 통제 장치였다.  

이 출판법 제13조에 의하여 1910년 4월 15일에 이성식 저작의 『중등창가(中等唱歌)』와 4월 20일에 이기종 저작의 『악전교과서(樂典敎科書)』가 발매 반포를 금지당하고 차압 조치되었다. 1911년 10월 20일에는 「사립학교규칙」(조선총독부령 제114호)을 발표하여, 사립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과서는 조선총독부가 편찬하거나 검정을 마친 것으로 규정하여 학교 창가를 통제하였다. 1939년에는 교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교가인가제(校歌認可制)」를 시행하였다.

1912년 3월 25일에는 「경찰범 처벌규칙」(조선총독부령 제40호)을 공포하였다. 제1조 제20항에는 ‘불온한 노래를 부르거나 반포하는 것’이 불허되었다. 제86항에는 ‘허가를 받지 아니하고 극장 및 기타 흥행장을 개설한 자’는 구류 또는 과태료에 처할 수 있었다. 1925년 4월 21일에는 「치안유지법」(법률 제46호)을 제정하면서 3·1운동 이후 대두된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고, 사회주의운동과 관계된 노래 역시 금지시켰다. 대표적으로 노동운동가인 〈메이데이 노래(May Day Song)〉, 〈우크라이나 혁명가〉, 〈독일 공산당 혁명가〉 등이 금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찬송가도 통제하였다.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통하여 ‘찬미가·기도문·설교 등으로서 그 내용이 불온한 것에 대해서는 출판물의 검열 및 임감(臨監) 등에 의해 엄중 단속할 것(제4항)’을 규정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일제 정보국에서 연합군에 참가한 나라의 음악을 ‘적성음악(敵性音樂)’으로 규정해 1943년부터 금지시켰다.

음반의 통제조선총독부는 유성기 보급이 확대되고 음반이 대중화되자 음반에 대한 검열제도의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다. 이에 1933년 5월 22일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47호)을 공포하고 단속을 시행하였다.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은 음반의 생산과 유통 등 레코드에 관계된 일체를 통제하고자 한 법령으로, 검열 및 단속 사유는 ‘치안방해’와 ‘풍속괴란’이었다. 치안방해는 사상의 검열이 목적이었고, 풍속괴란은 저속·퇴폐 등 표현의 자유를 구속한 것으로 사회의식 통제가 목적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8년 1월 내무성 검열과는 「레코드 신취체방침」을 발표하여 음반의 통제를 강화했는데, 전쟁이라는 시국을 반영해 전사(戰死)를 애상적으로 노래한 것과 나약한 감정의 노래와 음반을 금지시켰다. 음반의 판매 금지 및 압수 조치는 새롭게 출판되는 음반뿐만 아니라 이미 출반되어 유통되고 있는 모든 음반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취체 처분된 음반은 판매 금지뿐만 아니라 압수되었고, 이미 음반을 구입한 자라도 공개적인 음반의 감상 행위가 금지되었다. 

곧 사전 및 사후의 이중 검열 체계였다. 또한 음반의 금지는 노래의 금지 조치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노래의 출판, 교육·공연·가창 등이 금지되면 그 노래가 수록된 음반도 동시에 행정 처분되었다. 노래의 금지는 곡조와 가사의 내용뿐만 아니라 창법의 문제도 검열의 대상으로 삼았다. 문자로 표현된 가사 내용은 문제가 없지만, 노래로 표현될 때 풍기상 문제가 있어 금지된 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대개의 법령들이 일본에서 먼저 제정·시행된 후 조선 상황에 맞게 수정하여 시행된 것에 반해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은 일본보다 먼저 제정·시행된 법령이었다. 그만큼 조선에서의 레코드 검열은 일본에서보다 중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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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최대 레이블이었던 오케레코드에서 운영했던 조선악극단              


공연(흥행)의 통제

1910년 4월 1일 부산 이사청은 청령 제2호로 「흥행취체규칙」을 공포하여 공연에 관한 통제를 시도하였다. 총 11조로 구성된 규칙은 공연을 하려는 자는 서류를 구비하여 경찰 관리의 인가를 받아야 하고(제1조), 극장이 아닌 곳에서는 공연을 할 수 없었으며(제4조), 경찰관은 공연이 풍속을 문란하게 하거나 공안을 해친다고 인정될 때에는 정지시킬 수 있었다(제9조).

음악회·연극·연예 등 공연은 현장에서 내용이 수정될 수 있는 현장물이기에 사전 검열만으로는 통제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현장을 통제할 수 있는 법령이 필요했고, 1922년 「흥행장 및 흥행취체규칙」이 공포되었다. 현장 판단은 임석경관에 의해 이루어졌고, 임석경관의 통제 권한은 공연 내용을 넘어 공연장 내에서 이루어지는 공연 관계자와 관객의 모든 행동이 대상이었다. 허가받은 공연이더라도 각본·설명서·예인감찰(藝人鑑札) 등을 요구할 수 있었고, 공연 시간을 제한하거나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었다. 곧 공연장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을 감시하고 판단하여 공연을 정지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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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에서 발행한 대중음악가 현경섭의 제344호 기예자 증명서(1944)         


공연예술인의 통제

1944년 5월 8일 「조선흥행등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197호)이 공포됨으로써 예술인에 대한 통제까지 실행되었다. 이 법령의 특징은 ‘기예자증명서제도(技藝子證明書, 기예증)’ 시행에 있었다. 기예증은 공연예술인 허가 증명서로, 기예증을 발행·소유한 사람만이 공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공연예술인 자격증 제도였다. 과거 법령들이 작품과 공연 및 공연장을 통제했다면, 기예증 제도는 공연예술인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장치였다.

이 제도는 기예자뿐만 아니라 연출자 및 기획 제작자(흥행자) 할 것 없이 공연에 관련된 모든 예술인이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작품과 공연 통제에서 한걸음 나아가 공연의 주체인 예술인 자체를 통제하는 장치였다. 기예증을 받은 예술인들은 전쟁에서의 각종 징집을 제외 조건으로, 일제 정책의 홍보에 적극적으로 동원되거나 이용되었다.


통제의 답습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음악통제제도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음악통제제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통제 방식의 텍스트와 컨덱스트의 동시적 통제, 사전 검열과 사후 검열 방식, 금지 사유 등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통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음반 검열 관련 조치인 문교부의 「레코드제작 조치사항」(1949. 7.)과 「국산레코드 제작 및 외국 수입레코드에 대한 레코드 검열기준」(1955. 10.)은 일제강점기 음반 검열 장치인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47호, 1933. 5. 22.)의 방식을 적용한 것이다. 예술인 및 공연에 대한 관련 조치인 「극장 및 흥행취체령」(1946. 2.), 「흥행취체에 관한 고시」(1947. 1.), 「무대예술인 자격심사제」(1950. 2.), 「공연단체등록 및 공연신고제」(1950. 2.) 등은 일제강점기의 「조선흥행등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197호, 1944. 5. 8.)의 내용을 포괄해 적용한 것이다. 특히 「무대예술인 자격심사제」는 「조선흥행등취체규칙」의 ‘기예자증명서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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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자 증명서(좌) / 흥행자 증명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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