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한국민족운동이었던

어린이날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2021년 올해 99회 어린이날을 맞아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요즘은 ‘어린이날’ 하면 ‘5월 5일’, ‘공휴일’, ‘선물’, ‘놀이동산’ 등을 먼저 떠올린다. 196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창경원(현 창경궁), 장충체육관, 효창운동장 등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날이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고 민족운동 차원에서 행사가 치러졌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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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년총연맹이 주관한 어린이날 포스터(1928. 5. 6.)          


소년운동으로 전개된 어린이날

어린이날은 1921년 진주 등지에서 3·1운동 이후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고자 소년회가 조직되면서 비롯되었다. 이어 설립된 천도교소년회가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이라 정하고 첫 행사를 열었다. 인간 평등을 꿈꾼 동학을 이은 천도교가 앞장서고 교주 손병희의 사위인 방정환이 주도하였다. 당시에는 ‘어린이’를 부모의 소유쯤으로 여겼는데, ‘10년 후 조선을 여(慮)하라’는 어린이날의 취지는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1923년에 40여 단체가 합심하여 조직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공식적으로 행사를 추진하였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행사가 개최되었고 몇 군데는 기행렬(깃발을 들고 행진)을 벌였다. 어린이날 행사가 소년운동의 하나가 되었다. 1924년부터는 포스터가 제작되었고 행사가 더 풍성했으며 지방의 개최 수도 늘어났다. 다만, ‘5월 1일’ 행사가 메이데이와 겹치면서 일제 경찰이 어린이 행사를 불허 혹은 중지하곤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1925년에는 조선여자청년회·여자기독청년회·조선여자교육협회도 행사에 동참하면서 7천 개의 고무풍선이 하늘을 메우는 등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때 처음으로 당시 유행하였던 야구가(野球歌) 곡조에 노랫말을 입힌 ‘어린이 노래’가 제창되었다. 첫 구절이 “기쁘구나, 오늘날 5월 1일은 우리들 어린이의 기쁜 날일세”라고 시작하는데 오늘날과 사뭇 다르다.

그런데 1926년 무산소년운동을 표방한 오월회도 별도의 행사를 추진하면서 주관 단체가 양분되고 말았다. 비록 순종이 승하하는 바람에 집회가 금지되어 두 단체의 대립은 격화되지 않았지만,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오월회는 “우리는 항상 조선 어린이인 것을 잊지 맙시다” 등의 표어를 내걸었고, “어른 대접과 똑같이 어린이를 대접합시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나게 됩니다”라며 사뭇 다른 주장을 펼쳤다.

1927년에 두 단체가 별도로 어린이날 행사를 진행하였다. 어린이 5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축하 비행이 있었고 라디오 프로그램도 특별 편성되었다. 5월 3일에는 우천으로 연기된 기행렬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어린이들은 악대의 뒤를 따라 ‘어린이 노래’를 부르며 서울 시내를 행진하였다. 이날 개최된 메이데이 행사와 섞일 것을 염려한 일본 기마경관대가 기행렬을 따랐고 정복·사복 경찰들이 감시하였다. 

두 단체는 사회적인 비판과 더불어 신간회의 창설과 맞물려 1927년 10월 ‘조선소년연합회’로 통합하였다. 아울러 행사 날짜를 메이데이를 피해 5월 첫 번째 일요일로 변경하고 ‘현실에 주의하여 장래를 준비하고자’ 운동 방향의 대전환을 통해 소년운동의 민중화를 꾀하였다. 얼마 뒤 조선소년연합회는 조선소년총연맹으로 바뀌었고 ‘어린이날 노래’도 몇 구절 수정하였다. 이를 기회로 소년운동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잡지가 생겼고 동화집·동요집 등이 쏟아졌다.

조선소년총연맹이 주관한 1928년 5월 6일 어린이날 행사는 예년과 달리 각 가정에 복등(福燈)이, 길거리에 축등(祝燈)이 내걸렸다. 이날 비가 오는 와중에도 2천여 명 참가한 가운데 수송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기념식이 치러졌다. 식후에 어린이들은 행사장을 출발하여 안국동을 지나 종로로 기행렬에 나섰으나 비로 중단하였다. 단성사는 이를 활동사진으로 남겼다. 그런데 불쑥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나타나더니 ‘새 조선을 건설하자’라는 깃발을 압수하여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이는 일제가 이를 경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일제의 회유와 탄압

일제는 ‘어린이날’ 행사가 소년운동 차원에서 전개되자 이를 방해하기 위해 1928년 5월 5일을 ‘아동애호일’로 정하여 맞불을 놓았다. 일본은 이날을 단옷날이라 하여 남자아이를 위한 어린이날(코도모노히)로 기리는데 식민지 조선에도 이를 시행한 것이다. 일제는 친일 단체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는가 하면 무료 건강상담소 설치, 창경원 무료 개방 등을 통해 어린이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그런데도 1920년 후반 소년단체가 500여 개에 달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지자 일제는 위기감을 느끼고 소년운동 통제에 나섰다. 1929년 어린이날 행사는 3·1운동 10주년을 맞이한 해였고 ‘아동애호일’과 겹쳤다. 일본 경찰은 10만 장의 선전지를 압수하고 행사 당일 식사·축사·답사도 중지시켰으며, 지방에서는 관련자들을 감금, 구속까지 하였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930년에 어린이날준비위원회는 보다 더 준비를 철저히 하여 당일 새벽에 나팔을 불어 어린이날임을 알리는가 하면 ‘행복은 어린이부터’, ‘잘 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 등의 표어주(標語柱)를 설치하였고 사진 촬영 반값, 무료 건강진단 병원 확대 등을 통해 어린이들이 사상 최대인 1만 2천여 명이 모였다. 이때 제대로 된 기행렬이 펼쳐져 행사장 수송보통학교를 출발하여 청진동→→종로→안국동4가→공평동→남대문통→황금정→조선은행→남대문통→태평통→경성부청을 거쳐 광화문통 광장에서 해산하였다. 1931년부터는 ‘전선어린이날중앙연합준비회’가 주관하면서 사회주의 성향을 강하게 내포되어 실천운동 차원에서 어린이날 행사가 치러졌다. 이날 ‘조선의 희망 어린이의 경절(慶節)’이란 깃발이 휘날렸고, 학대 방지·입학난에 따른 의무교육 실시·조혼 폐지·문맹 퇴치 등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어린이날 창설 10주년을 맞은 1932년에는 ‘어린이 문제를 잊으면 내일이 없고 내일이 없으면 살길이 없다’라는 표어도 남달랐다. 당시는 옥외집회에서 종교적인 것을 제하고는 어린이날 행사가 유일하였기 때문에 이를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1933년에 일제의 회유책과 탄압에 소년운동 단체가 82%가 줄었지만, 미주·중국·일본 등지의 한인들이 어린이날 선전물을 청구하였고 행사를 지원하는 민간단체가 늘어났으며 아동보호 차원의 사회입법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소년운동 차원에서 어린이날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제는 어린이날을 통해 소년운동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럴수록 일제의 탄압은 거세져 1934년에 잡지 『어린이』를 폐간하였고, 5월 2일부터 8일까지 ‘아동애호주간’으로 정하여 어린이날 행사를 원천 차단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1937년 5월 2일에 열린 어린이날 행사일에 어린이들은 일본 국가 합창을 거부하며 소극적인 저항을 펼쳤다. 이후 일제는 어린이날을 없애버렸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기에 접어들자 일제는 ‘아동애호주간’을 국민총력연맹에게 관리토록 하고 조선신궁에서 아동건강애호제를 거행하거나 이에 참배한 6세 미만의 아동에게 어기수(몸에 지니는 부적)를 배부하였다. 더욱이 1943년 4월 일제는 ‘건아(健兒)는 건병(健兵)의 초석, 어린이는 흥아(興亞)의 꽃’이라며 만 14세 미만 어린이를 대상으로 육군학교소년병을 모집하였다. 이들 중 몇몇은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었다. 일제는 ‘아동애호’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조선의 아동을 전쟁의 방패막이로 삼았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잡지 『어린이』가 다시 발행되었고, 그해 5월 5일 광복 후 첫 어린이날 행사장에 오늘날 ‘어린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이어 “우리는 왜족에게 짓밟혀 말하는 벙어리요 집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집과 우리글을 찾기로 맹세합니다”라는 선서문이 낭독되었다. 이후 어린이날은 국가적 행사가 되었고, 1975년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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