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수꾼

엄항섭과 연미당 부부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를 졸업한 만 19세의 연미당은 1927년 3월 청년 독립운동가 엄항섭과 결혼하였다. 당시 기혼자였던 엄항섭은 부인과 사별한 후 연미당과 혼인의 연을 맺게 되는데, 이는 연미당의 부친 연병환과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들 부부는  항일투쟁이라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동반자로 걸어갈 수 있는 희망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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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엄항섭은 1898년 9월 1일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현 산북면) 주록리 90번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엄세영으로 농상공부아문 대신 판중추부사,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아버지는 승지 엄주완이다. 어머니 김씨는 김규식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외할아버지는 규장각 제학과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본관은 영월, 호는 일파(一波)이다. 다른 이름은 엄대형·엄일파, 중국 망명 당시에는 ‘예빗엄’이라고도 했다. 형제로는 형 엄승섭과 동생 엄홍섭 등이다. 어린 시절에 성장 과정은 거의 알 수 없다. 보성법률상업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천지를 진동시킨 3·1운동이 활화산처럼 폭발하였다. 역사적인 현장을 목격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다짐한 후 곧바로 중국 상하이 망명길에 올랐다. 그곳에는 이미 민주공화제를 천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여기서 백범 김구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1919년 9월 연해주·상하이·서울 등지에 각각 수립된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를 중심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이때 그는 법무부 참사에 임명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항저우에 있는 지장대학(芝江大學)에 입학하여 중국어·영어·불어 등을 공부하였다. 이는 훗날 다양한 외교활동을 펼치는 든든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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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과 연미당 결혼식(1927)         


임시정부 파수꾼으로서 활동하다

1922년 졸업과 동시에 중국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항일투쟁 방법론을 둘러싼 극심한 반목과 갈등은 수습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조직 조차 유지하기 힘든 형국이었다. 더욱이 경제적인 곤궁으로 청사 집세는 물론, 임정 요인들의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극한에 달하였다. 반드시 임시정부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결심한 그는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하여 요인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나아가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는 단순한 생계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 영사관 정보를 수집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김구는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임시정부 활성화 방안으로 헌법 개정에 착수하였다. 엄항섭은 헌법개정 기초위원으로 참여하여 국무위원제를 채택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김구가 자싱(嘉興)으로 피신해 있을 때도 곁에서 보좌하였다. 일제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걸고 김구의 체포에 혈안이었다. 중국인이나 한국인도 이에 현혹될 수 있는 위급한 순간을 맞았다. 그는 곁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보호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난징에서 김구가 중국 국민당 총수 장제스를 만나러 갈 때도 수행하는 등 한중 연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한편 민족유일당운동이 좌절된 후 정당 결성은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촉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정당 난립으로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를 맞는 가운데 정당통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엄항섭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이를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외곽단체로 한국국민당청년단이나 한국청년전위당 등을 결성하는 동시에 『한민(韓民)』과 『한청(韓靑)』 등을 발행하여 청년들에게 독립운동 노선과 지도 이념을 교육·선전하였다.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에 안착하였다. 첫째 과업은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 창설이었다. 가릉빈관에서 성대한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중국국민당을 비롯하여 외국사절 등 200여 명이나 참석하였다. 엄항섭은 행사를 주관하였다. 그는 광복군 활동상을 미주 한인사회에 알리면서 재정적인 지원을 호소하였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선전부장을 맡아 이념을 초월해 항일무장 대오를 견결하게 만들었다. 

임시정부가 난관을 극복하면서 존립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엄항섭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다. 열정적인 활동은 임시정부를 유지·존립시키는 원천이었다.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정파나 이념을 초월한 진지한 태도는 대동단결을 도모하는 밑거름이었다. 그에 대한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나 ‘젊은 일꾼’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미사여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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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 초대회에서 엄항섭              


제2의 독립운동에 나서다 

광복 후 엄항섭은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환국했다. 국내에서도 이전처럼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며 김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정하에서 임시정부 이름으로 활동할 공간은 너무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이를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동참하였다. 남북에 이념과 체제가 다른 정부가 수립됨으로 결국 한민족은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하고 말았다. 더욱이 스승처럼 모시던 김구가 흉탄에 서거하면서 통일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다. 

김구 선생의 평생 동반자였던 엄항섭은 장례식 때 추모사를 읽고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다. 엄항섭은 가슴 깊숙이 용솟음치는 슬픔을 느꼈다.


김구 선생 추모사 중에서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 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녁마다 듣자왔는데, 오늘 저녁부터는 뉘게 가서 이 말씀을 듣자오리까.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아침마다 뵈었는데, 내일 아침부터는 어데 가서 그 얼굴을 뵈오리까.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합니다. 


임정 요인으로 환국한 엄항섭은 조완구와 함께 김구를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서 김구 명의로 발표하는 성명서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을 대부분 기초했다. 엄항섭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1956년 7월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하여 상무위원 11인과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반당·반혁명 행위’ 혐의로 체포되어 1962년 7월 30일 숨을 거두어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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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당 가족사진        


연미당은 든든한 동지였다

엄항섭이 임시정부의 숨은 일꾼으로 활동한 배경에는 부인 연미당(본명 연충효, 延忠孝)을 빼놓을 수 없다. 부부의 인연을 맺어 준 사람은 바로 석오 이동녕이었다. 연미당은 연병환의 딸로 1908년 7월 만주 룽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난징 부근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독립운동가들과 빈번하게 접촉했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묵묵히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엄항섭의 인간적인 모습에 매료되었다. 부모들도 두 사람의 결합을 반대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안사람의 역할은 다양하고 막중하였다. 남편의 내조는 물론 가족들에 대한 생계 책임과 자녀의 교육문제도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1930년 중국 상하이에서 이념적인 대립으로 임시정부가 파행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한인여자청년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한국독립당이나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교민들 단합을 위하여 활동하는 한편 3·1절 기념행사와 8·29국치기념일 등 각종 기념행사가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물 위에 뜬’ 정부였다. 남편은 중국 정부와 연락 임무를 맡아 가정을 돌볼 틈이 전혀 없었다. 연미당은 임정 가족을 돌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는 이동녕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힘든 상황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억척스러운 그의 모습은 남편에게 커다란 용기를 불어넣는 에너지원이었다. 1936년부터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남편을 지원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일제 침략으로 난징에서 창사로 이동한 3·1절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등 여성들 분발을 촉구하였다. 당시 중국인 내빈들도 한중 연대를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연미당은 중국 창사에 있는 남목청에서 3당 통일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김구를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이 되어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하였다. 충칭에서는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으로서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담당하였다.

독립운동 중에도 옷 세탁과 삯바느질로 돈을 벌어 능력이 닿는 대로 임시정부 지원에 앞장섰다. 필요한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할 때 광복군 모집에 열성을 다했다. 환국을 준비하면서 한국은 반드시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남편이 먼저 귀국해 이별을 맞는 순간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귀국을 준비하는 동포들의 안전에 많이 노력하였다.

딸 엄기선도 독립투사로서 키웠다. 중국 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상과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리는 데 매진하였다. 또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병들을 위문하여 광복군으로 합류를 권유하였다.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선전공작에 진력하는 등 독립군의 사기 진작에도 열성적이었다. 연미당 가족은 월북 가족으로 오해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연미당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경제적 어려움과 과로로 갑자기 찾아온 중풍으로 오랜 세월을 병마와 싸우다가 73세에 사망하였다. 이처럼 가족의 삶은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조국 광복을 향한 인생역정은 가슴 벅찬 감동으로 성큼 다가온다. 국립대전현충원과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이들 부부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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