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독립과 여성해방을 꿈꾸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숨은 주역 소녀회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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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장매성(張梅性)1911~1993 전남 광주건국훈장 애족장(1990) / 박옥련(朴玉連)1914~2004 전남 광주건국훈장 애족장(1990) /

박현숙(朴賢淑)1914~1981 전남 광주건국훈장 애족장(1990) / 장경례(張慶禮)1913~1997전남 광주건국훈장 애족장(1990)


여학생 주도의 비밀결사, 소녀회가 결성되다

1920년대 학생들은 일제의 민족 차별 교육 등에 맞서 등교를 거부하며 동맹휴학(이하 맹휴)을 전개하는 한편 독서모임이자 비밀결사인 독서회를 결성하였다. 1928년 4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여고보) 학생들도 맹휴를 전개하고 1928년 11월 초순 독서회인 소녀회(少女會)를 조직하였다. 소녀회는 민족 독립과 자유 쟁취, 여성 해방을 목적으로 매월 사회과학 서적을 학습하며 학생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 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와 백지동맹 전개 등 일제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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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1927)(좌) / 장매성 가족사진_전남여자고등학교 역사관 제공(우)                  


소녀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동참하다 

일제의 민족 차별 교육에 저항한 맹휴와 독서회 활동으로 축적된 학생들의 항일의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오전 한·일 학생 간의 충돌로 시작되어 오후부터는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가세한 1차 가두 시위로 확대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일 소녀회 회원인 장매성·박옥련·박현숙·장경례는 약국과 가정 등에서 붕대와 구급약을 가져와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물과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등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이 한국인 학생들을 긴급 체포하며 시위를 강경 진압하자 분노한 학생들은 투쟁 본부를 마련하여 2차 시위를 준비하였다. 11월 12일 전개된 2차 시위에서 소녀회 회원 장매성은 시위에 필요한 격문 수천 장을 인쇄하여 힘을 보탰다. 11월 14일에는 소녀회 회원들이 다니는 광주여고보에서 독립가를 합창하고 만세를 외치는 등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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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여학생 만세 공판」(『조선일보』 1930. 2. 20.) / 「소녀회 피고」(『매일신보』 1930. 10. 7.) _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 / 

광주학생독립운동여학도 기념비 광주광역시기념물 제26호

백지동맹으로 일제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탄압하고자 조기방학을 했다가 1930년대 초 개학하면서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개학과 동시에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이때 1월 11일 장매성·박옥련·박현숙·장경례 등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이후 일제에 무차별적으로 검거된 학생들이 석방되어 같이 시험을 치르기 전까지는 시험을 거부한다면서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였다.

이처럼 백지동맹 등 1930년대 초까지 이어진 소녀회의 활동은 1930년 1월 15일 일제 경찰이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소녀회 회원들이 검거되면서 중단되었다. 장매성은 징역 2년, 박옥련·박현숙·장경례는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소녀회를 결성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 등에 참여한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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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자고등학교 제2회 명예졸업식 사진(1958. 11. 3.)_전남여자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우리는 세 겹으로 압박을 받고 사는 인생임을 너희들은 아느냐! 

첫째로 무산자이니 자본계급에게 짓밟히고 

둘째로 **이니 사람이나 **에게 **받고 

셋째로 여자이니 남자들에게 시달리지 아니하는가.

우리가 이렇게 삼중으로 받는 압박을 벗어나서 

인간다운 세상을 살자면 사회과학을 연구할 급무가 있지 아니한가.

소녀회 결성 당시 장매성의 주장 중에서(192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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