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발자취

민족시인 이상화의 

항일정신이 깃든

병풍 10폭에 담긴 이야기

독립의 발자취

글·정리 편집실


민족시인 이상화와 함께 서화가 서동균 등 일제강점기에 대구를 중심으로 교류하던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품은 병풍 한 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병풍은 그 옛날 이상화 시인이 포해 김정규에게 선물한 것으로, 지금까지 이를 보관 중이던 선생의 아들 김종해 씨가 기증 의사를 밝혔다. 병풍 기증을 도운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 임언미 학예연구관에게 관련 이야기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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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구곡담〉 시를 담은 병풍(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 제공)        

1932년 음력 5월, 

민족시인 상화(尙火) 이상화(1901~1943) 선생이 

당대 명필 서예가 죽농(竹濃) 서동균(1903~1978) 선생에게 부탁해 

〈금강산 구곡담〉을 병풍에 새긴 뒤 포해(抱海) 김정규(1899~1974) 

선생에게 선물하였다. 병풍에 새겨진 〈금강산 구곡담〉 시는, 난사 최현구(1829~1900) 

선생이 금강산 답사 후에 쓴 내용이다.

10폭 병풍의 크기는 폭 400cm, 높이 174cm다.


〈금강산 구곡담〉 시가 담긴 10폭 병풍이 어떻게 대구시에 기증되었나요?

대구시에서 문화예술아카이브 구축 작업을 하면서 자료 수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문에 공개되고, 2020년 9월 말 포해 김정규 선생의 셋째 아들 김종해 씨가 서울 자택에 보관 중이던 병풍에 대한 기증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이에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이 김종해 씨 자택을 방문해 서화 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한 뒤 기증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김정규 선생의 셋째 아들 김종해 씨는 어떠한 연유로 기증을 결심했나요?

1974년 선친인 김정규 선생이 돌아가신 뒤 유품 보관은 김종해 씨 책임이었습니다. 김종해 씨는 선대 어르신의 뜻이 담긴 병풍의 진정한 가치를 후대에도 이어가야 한다는 마음에, 이상화 시인의 후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후 이상화 시인의 고향인 대구시에서 문화예술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증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병풍 기증이 공개된 후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또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요.

병풍에 대한 사연이 언론에 처음 알려졌을 때, 많은 사람이 기증자 김종해 씨와 병풍에 얽힌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에 병풍 공개를 위해 잠시 대구미술관에서 기증행사를 진행했고, 현재는 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간 가정집에서 오랜 세월 보관되어 왔던 터라 보존 작업이 필요한 상태이며, 추후에는 미술관 기획전시 등에 활용할 예정입니다.


해당 병풍은 근대기 대구 문화 주역들의 사연을 품은 역사적 산물과도 같은데요, 

어떠한 의미로 평가되고 있는지 설명해주세요.

병풍에는 1932년 서동균이 붓으로 글을 쓰고 이상화가 김정규에게 선물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국내 서화 작품 중에 이같이 제작 연도와 작품에 얽힌 사연이 뚜렷하게 기록된 것은 드문 사례입니다. 무엇보다 해당 병풍은 일제강점기인 근대기 민족시인 이상화의 나라에 대한 생각을 전반적으로 알려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특히 가치가 있습니다. 거기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더해져 높이 평가할 수 있는데요, 1930년대 제작된 일반적인 10폭 병풍보다 이상은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증과 같은 사례가 후대에 어떤 의미를 남길까요?

만약 이 병풍이 김종해 씨 집에 계속 머물러있었다면 그에 얽힌 이야기는 세상 밖으로 나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상화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었고, 서동균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겪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어도, 두 사람의 친분 관계에 대한 별다른 증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김정규 선생이 가산을 털어서 독립운동 자금을 충당했고, 대구노동공제회 및 신간회 활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이나 옥고를 치른 민족지사였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 기증을 통해 훗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가 더욱 풍성해질 것으로 기대하며, 어떤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물건을 개인이 보관하기보다 대의를 위해 기증되었을 때 그 물건의 가치가 더 깊고 넓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준 소중한 선례로 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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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균(왼쪽) / 이상화(오른쪽)


금강산 구곡담에 담긴 항일의 의미

〈금강산 구곡담〉 시를 담은 10폭 병풍은 이상화 시인이 기획하고 죽농 서동균이 행초서로 쓴 서예 작품이다. 병풍에는 이상화 시인의 교유 관계는 물론, 작품 속에 녹여낸 근대기 문화인들의 항일정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병풍에 담긴 세 사람의 민족정신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잘 알려진 민족시인이며,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 간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된 바 있다. 서동균 또한 근현대기 주요 작가로 서예·사군자·수묵화를  잘했던 서화가이다. 김정규는 1924년 대구에서 대구노동공제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일본에 유학 중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신간회 활동을 이어간 민족지사이다. 

이들 세 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병풍은 의미 있는 작품이다. 1932년 병풍이 제작될 당시 서동균은 30세, 이상화 32세, 김정규는 34세로 비슷한 또래였다. 서로 교유한 관계였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단지 이상화가 10폭이나 되는 대작을 부탁할 만큼 서동균과 막역한 사이였고, 이러한 작품을 선물할 만큼 김정규는 이상화가 존중하는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일본에 유학한 경험이 있고 근대국가로 성장한 일본의 발전상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기에 조국과 민족의 앞날에 대한 고뇌가 더욱 깊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모두 나라 잃은 암울한 시기에 민족정신을 잃지 않았던 젊은 엘리트들이었다.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금강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소규모 국토 순례의 개념으로 금강산 답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금강산을 빼앗긴 국토로 상징화해 시나 그림, 노래 등을 짓곤 하였다. 그중 〈금강산 구곡담〉은 최현구(1829~1900) 시인의 『난사집』에 수록된 시이다. 최현구는 1859년에 내금강 만폭동 계곡을 답사하고 이 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크고 작은 물줄기가 많은 만폭동에는 이름 붙여진 ‘담’도 많았는데, 대부분이 여덟 곳으로 노래해 ‘만폭동 내팔담’으로 알려져 있다. 최현구는 여기에 백룡담을 추가해 ‘구곡담’이라 칭하였다. 

이상화 시인이 병풍에 새길 글귀로 금강산 구곡담을 택한 이유는 아마도,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도 의연한 산하를 의지하여 일제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지키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강산은 그러한 마음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이어 서동균은 금강산 구곡담에 등장하는 9개의 담인 ‘백룡담·흑룡담·비파담·벽파담·분설담·진주담·구담·선담·화룡담’을 제1폭부터 제9폭까지 새겨 넣었다. 매 폭에 두 줄로 칠언절구 시의 본문을 쓰고, 세 번째 줄 중간 부분에 제목을 썼다. 그리고 마지막 제10폭에 서동균이 글씨를 쓰고 이상화 시인이 김정규에게 선물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병풍 제10폭에 적힌  내용

우(右) 난사(蘭史) 최현구 선생(崔鉉九先生) 구곡담시(九曲潭詩) 

세(歲) 임신(壬申) 중하(仲夏) 후학(後學)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 서위(書爲) 포해(抱海) 

김정규 대인(金正奎大仁) 이상화(李尙火) 정(呈)


오른쪽은 난사 최현구 선생의 구곡담 시이다. 

때는 1932년 음력 5월, 후학 죽농 서동균이 

포해 김정규 대인을 위하여 쓰다. 

이상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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