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교육자에서 독립운동가로 거듭난 

이애라와 이규갑 부부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이애라는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20세가 되던 해 독립운동가 이규갑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 후 남편 이규갑과 함께 공주 영명학교와 평양 정의여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고 행복한 신혼을 보낸다. 이후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1920년에는 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모금운동도 벌이게 된다. 어린 딸을 업고 뛰면서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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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회 선포문(1919. 4.)


조국 독립의 정당성을 담대하게 말하다

때는 바야흐로 3·1운동 만세 소리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후 열기가 점차 숨 고르기를 하던 시절이었다.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가 시작되었다. 국내에서 항일활동이 불가능해진 이애라는 먼저 러시아로 망명한 남편 이규갑을 찾아 나섰다. 중간 기착지인 웅기항에는 그녀를 체포하기 위한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제 헌병과 경찰 등의 눈초리는 날카롭게 움직였다. 검문검색에 혈안이었던 요시다는 방금 도착한 그녀를 보자마자 한국인 헌병보조원에게 곧바로 포박을 명령하였다. 갑자기 웅기항에는 서슬 퍼런 불호령이 침묵을 깨뜨렸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순순히 걸어가겠다! 포승줄도 하지 마라! 지은 죄도 없고 도망치지도 않을 것인데 그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 순간 헌병보조원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어 “우리 국모를 능욕해 돌아가시게 하고 우리 황제의 자리를 빼앗는 왜놈들의 개·돼지가 되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너희는 대한제국의 백성이 아니냐? 신라의 개·돼지는 될지언정 왜놈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며 참수당한 박제상을 모르느냐!”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조차 할 수 없는 일갈이었다.


이애라 인생 항로가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다

본관은 전주, 고향은 충남 아산이다. 1891년 1월 서울에서 기독교인 이춘식(李春植)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이심숙(李心淑)이나 우리에게 이애라와 이애일라로 알려진 신여성이었다. ‘애라(愛羅)’는 서양 이름 애나(Anna)로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이름이다. 여기에서 그녀의 깊은 신앙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고 모교 교사로 재직하던 충남 공주 영명여학교 교장 사애리시와 이화학당장의 중매로 이규갑(李奎甲)을 만나 결혼하였다. 당시 이규갑은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열정적이었다.

영명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계속하면서 남편과 함께 여자야학교를 운영하는 등 근대교육 보급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이들 부부에게 근대교육 보급은 곧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는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영명학교와 영명여학교 교사와 졸업생·재학생은 공주지역 3·1운동 주역으로 성장하였다. 남편이 평양기독병원의 전도사와 기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1918년 평양의 정진소학교와 정의여학교로 근거지를 옮겼다. 여학생들에게 다정다감한 어머니로서 모범을 보였다. 

이듬해 서울에서 공주와 평양 소식을 접한 부부는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분주한 나날이었다. 1919년 1월 말경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동지들의 연락이 있자,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상경하였다. 이애라도 1남 2녀 중 막내딸만 안고 서울에 올라와 남편 독립운동을 도왔다.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석방이 되자 곧바로 동지들과 합류하여 독립지사와 가족들 후원을 위한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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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라         


슬픔을 항일운동으로 승화시키다

3·1운동이 요동치던 어느 날 어린 딸아이를 업고 아현동 언니 집으로 가던 도중에 일제 헌병을 만났다. 아이는 백일이 갓 지난 상태였다. 헌병은 아이를 빼앗아 길에 내동댕이쳐서 즉사시켰다. 아이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체포되는 참담한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 처량한 운명이었다. 이때 뒤에 있던 유득신이 아기를 안았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 청천벽력이란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유득신은 말없이 시체를 거두어 아현성결교회 공동묘지에 고이 묻었다. 남편 망명 이후 계속된 체포와 고문에도 이애라는 수원·공주·아산 등지를 순회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항일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경찰은 이애라를 연행하여 온갖 고문을 하면서 남편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석방된 후 생계를 위해 천안 양대여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일제 경찰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걸핏하면 연행하는 등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른바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생존마저 위협받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지옥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남편을 도우고자 러시아로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야간도주를 하여 웅기에 도착하였으나 다시 붙잡혔다. 다행히 조카가 지혜를 발휘하여 병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의사인 조카는 경찰이 방심한 틈을 타서 비밀리에 선편을 주선하여 이애라를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시켰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아이들은 큰아버지에게 보내고 자신은 병원에 입원하였다. 고문 후유증은 예상보다 심각하였다. 소식을 들은 남편은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제는 어디 가지 마오. 내가 두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당신을 도우리라.” 하며 반가움에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소망하던 만남이었던가. 기쁨도 잠시 안타깝게도 만난 며칠 만에 이애라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남편은 부인의 죽음 앞에서 올바른 인생 항로를 개척하리라 다짐을 거듭한다. 이윤옥 시인은 불꽃같은 이애라 인생역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이 시는 그녀가 살다간 31년이라는 짧은 삶을 너무도 구구절절하고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여성은 미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여성독립운동가의 굳센 의지를 여기에서 다시 한번 공감한다.

 

어린 핏덩이 내동댕이친 왜놈에 굴하지 않던, 이애라


월선리 산마루에 드리운 붉은 저녁노을

충혼탑에 어리는 소나무 그림자가 길고 깁니다.

어린 핏덩이 업고 

삼일만세 뒷바라지하다

왜놈에 아기 빼앗겨 살해되고 

차디찬 옥중에서 부르던 조국의 노래


식지 않은 그 열기  

평양으로 원산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뛰어다니며

암흑의 조국에 빛으로 나투신 이여  

어이타 스물일곱 그 아까운 나이에

왜놈의 모진 고문 끝내 못 이기고  

생의 긴 실타래를 놓으셨나요.


어이타 그 주검 그리던 고국으로 오지 못하고

구만리 이역  

이름 모를 들판에서 헤매고 계시나요.

오늘도 월선리 선영엔  

십일월의 찬바람만 휑하니 지나갑니다.

애국지사의 혼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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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갑 묘비          


이규갑은 누구인가 

1887년 11월 5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9세손인 이도희(李道熙)와 박안라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할 당시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에 별 뜻이 없었다. 교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이 항일운동에 뛰어든 건 홍주의병이 일어났을 때이다. 어머니 요구로 그는 의병들의 식량을 운반하는 일을 하면서 대의를 깨우쳤다. 나라를 잃으면 개인의 그 어떤 소망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이었다. 이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하였다. 귀국하여 영명학교 교사와 교감으로 근무하면서 이애라와 인연을 맺었다.

평양에서 전도사와 교장으로 재직 중 1월 평양 지역 대표로 상경하여 3·1운동 준비에 참여하였다. 만세운동이 국내외로 들불처럼 확산되는 열기 속에서 이규갑은 임시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은 시대적인 소명이자 필연적이라고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이규갑이 1919년과 1920년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내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한남수·김사국·홍면희 등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 소집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은 3월 1일 직후부터 ‘비밀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애라는 이들과 연락하는 동시에 은신처를 제공하였다. 4월 2일 인천만국공원에서 개최된 회의에 전국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되었다. 이규갑은 이애라가 투옥 중이던 4월 중순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한인청년회와 대한청년단 등에 가담하여 간접적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5월 이후에는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 대한적십자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러시아로 근거지를 옮겨 지청천·오광선·이민화 등과 독립군사관학교를 운영하는 등 장차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어 헤이룽장성 삼일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며 애국청년혈성단을 조직하는 한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목회자로서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이는 한인사회 청소년들에 민족정체성을 각성시키는 커다란 자극제였다.

1927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1929년 4월 신간회 경동지회 설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는데, 신간회가 해소되자 목회활동에 전념하였다.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과 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감리교회 재건운동을 선도하였다.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최고위원과 문교사회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순국선열유가족 조사위원장, 1956년 충국열사기념사업회 회장, 1959년 대한기독교반공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이규갑의 다음 회고는 촉촉하게 내리는 빗물처럼 심금을 울린다. “나는 문중의 죄인이다. 나로 인하여 내 처가 죽고 자식이 죽고 친족 7명이 죽었다. 나 때문에 문중에서 왜적에게 죽은 사람만도 9명이나 되니 선영에 그런 작죄(作罪)가 있겠는가. 또한 나는 내 신체에 대한 죄인이다. 양친에게서 받은 소중한 내 몸을 무수히 학대하였다. 왜적에게 잡혀 감옥행을 한 것만도 33회나 된다. 끔찍한 고문도 많이 당하고 매도 많이 맞아서 노구는 성한 데라고는 없다. 이 또한 불효요 불경이니 나는 내 몸에 죄인이다.”

교육자로서 신앙인으로 이들의 삶은 너무나 숭고하고 위대하다. 특히 가시밭길을 걸어간 이애라 인생 항로는 암울한 오늘을 밝히는 한줄기 아름답고 영롱한 빛이 되어 다가온다. 시대적인 소명의식에 충실한 인생역정이 새로운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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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갑과 이애라의 충국순의비 비문        


‘선생은 품성이 현숙, 효순하여 범사에 관후하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양육사업에 종사하다가 서기 

1919년 3·1독립만세 때에 애국부인회를 지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평양·공주에서 옥중생활을 하였다. 

서울에서 일본 헌병은 부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빼앗아 타살하고 부인을 체포·연행하였다.

그 후에 부군 이규갑이 독립운동을 하는 시베리아로 

밀행하다가 함경북도 승가항에서 왜적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하다.’

충국순의비 비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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