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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안희제 

독립운동 자금의 거점을 세우다

INPUT SUBJECT

글 이동언(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소장)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무엇보다도 절실하고 중요한 것은 독립운동 자금이었다. 독립운동가 안희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운영 자금의 60%를 조달했다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있어 전설적인 인물이다. 배가 고파서 우는 어린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심정으로 위험과 역경 속에서도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이 되고자 한 안희제의 독립운동을 통해 그의 구국 이념과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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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안희제


독립운동가들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는 데 평생을 바친 백산 안희제. 그는 영민한 독립운동가였고, 민족자본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자금이 있어야 독립군을 운영하며 총·칼 등의 무기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무단통치·문화통치·민족말살정책 등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고, 그때마다 그는 교육·무역·언론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항거하였다.


안희제의 생애와 독립운동

안희제(安熙濟)는 1885년 8월 4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학을 수학하다가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강제 체결로 국운이 기울자 상경하여 보성전문·양정의숙 등에서 신학문을 접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민중계몽을 위해서 교육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그는 고향인 경남 의령을 중심으로 의신·창남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에 전념하고, 윤상은과 함께 구포에 구명학교를 설립하여 자신이 직접 교장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또 교남학우회를 조직하여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1909년 10월에는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1년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결심한다. 이후 여러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국권 회복을 위한 대책을 협의하고 독립운동 단체도 방문한 뒤 중국을 거쳐 1914년 9월 국내로 귀국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강점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해 국외로 망명하여 국내와 연락할 방안이 필요하였다. 이에 안희제는 국내의 연락망과 재정기지 건설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백산상회를 설립하였고, 이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개편하였다. 남형우·최준·윤상은·박상진·서상일 등 영남지역의 청년 지사들과 함께했으나,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란 쉽지 않았다. 

일제의 지목을 받게 된 안희제는 이를 피하기 위해 여러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장차 독립운동을 전개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백산상회 관계자들과 함께 기미육영회를 조직하여 해외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또 중외일보를 통해 언론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로 더 이상 국내 활동이 어렵게 되자 안희제는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고, 1933년 발해의 고도인 영안현 동경성에서 독립운동기지건설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발해농장 경영에 착수하였다. 그 후 대종교 총본사가 동경성으로 옮겨오자 대종교에 이미 입교한 그는 대종교서적간행회 회장·천진전건축주비회 총무부장 등을 맡아 대종교 교세 확장을 통해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다. 그렇게 국권 회복에 힘쓰던 그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 임오교변*을 당하고 1943년 8월 3일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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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부산 중구 동광동에 설립한 백산상회


독림운동의 거점 ‘백산상회’ 설립

안희제는 1910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신채호·김동삼·이동휘·안창호·이갑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나 국권 회복을 위한 방략을 논의하였다. 당시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국내와 연락이 요구되었다. 국외에서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서는 국내의 비밀연락망 구축과 독립운동 자금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안희제는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한 결과, 국내 독립운동 기지 구축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맡기로 하였다. 안희제는 귀국길에 상하이에서 김구 선생을 만났다. 이때 김구는 안희제에게 국내 정세에 대해 물었다. 안희제는 “국내의 기강은 해이하고 변절자가 많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애국사상이 있다는 사람도 『정감록(鄭鑑錄)』의 ‘양백지간(兩白之間)에 가활만인(可活萬人)’만 안일하게 찾고 앉았다”라고 대답하며 “세상 사람들이 말끝마다 양백지간 운운한다”라고 하자, 김구는 안희제의 손을 잡으며 “양백지간은 바로 우리 둘이다”라고 하면서 ‘우리 두 사람이 장차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3년여간의 망명생활을 마친 안희제는 1914년 9월 귀국하였다. 그는 고향의 전답 2,000마지기를 팔아 부산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였다. 상회의 명칭은 그의 호 ‘백산(白山)’에서 땄다. 백산상회의 설립 목적은 국외에서 전개되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국내 연락망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한 독립운동 기지로 삼기 위함이었다. 

백산상회는 설립 초기에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상회였으나, 1917년 경기 호황에 힘입어 합자회사 백산상회로 확대·개편하였다. 1919년 5월에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발기인은 안희제·최준(崔俊)·윤현태(尹顯泰) 3인으로, 자본금은 100만 원이었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국내에 서울·대구·원산·인천 등 18개소, 중국에 안동·봉천·길림 등 3개소에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연통제·교통국·지방선전부 등을 설치하여 국내와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연통제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독립신문』 보급을 시도하였으며, 안희제는 이를 위해 국내 독립운동기지로 백산상회를 설립·운영하였다. 지금은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있던 자리에 백산기념관이 세워졌고, 용두산공원에는 안희제 흉상이 자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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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무역주식회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백산기념관(왼쪽) / 부산 용두산공원 광장에 위치한 안희제 흉상(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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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상회 신문 광고


“지금 우리의 사회는 모든 일을 창조할 때이다. 계림팔도를 통하여 기성(旣成)의 인재를 찾는 것은 하늘에서 혜성을 찾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마치 수명의 장공(匠工)을 갖고 수만간(數萬間)의 거택(巨宅)을 영조하려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인재 양성의 필요는 어느 시대와 어느 사회인들 급하지 않으리오만, 오늘날과 같이 급하고 절실한 때는 또 없다. 지역은 비록 작으나 국민은 2천만이다. 박옥잠룡(璞玉潛龍)이 어찌 없을쏘냐. 역사는 반만년이다. 국민을 교육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어찌 급하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1919년 11월 독립운동의 인재 양성을 위해 조직한 기미육영회의 취지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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