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관

일제강점기 해외 동포들이 

써 내려간 항일 민족시가

「단가」와 「아히들 노래」

인문학관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일제강점기 상하이,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미주 등 해외에서 발표된 망명인사들의 항일 민족시가들이 우리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아래 소개할 시가들은 1907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한 『공립신보』(1909년 『신한민보』로 통합)에 게재된 작품들이다. 당시 언론통제 아래 친일 문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던 국내 문학과는 다르게, 해외 동포들의 망명문학에서는 민족사의 정맥을 지켜 민족혼을 불태우고 있었다. 


일제는 1904년 한일협약 이후 우리의 황실에 경무고문을 파견하여 유생들의 벽보에서부터 신문의 원고를 사전에 검열했고, 이로써 반일 감정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때 미국에서 발간된 한인들의 『공립신보』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당시 한민족의 참상과 독립 의지를 널리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해외 동포들은 한결같이 4·4조의 가사체를 통해 식민치하에 시달리고 있는 고국 동포들의 실상과 광복의 염원을 표출하고 있었다. 4·4조 형식은 이들이 1903년부터 1905년 사이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오기 직전 고국에서 이미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던 문체였다. 해외로 망명한 애국 인사들은 4문체를 통해 이주 한인들에게 조국이 처한 현실 인식과 국권 회복을 위한 염원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잘 보면 모두 작자 이름이 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국내에 비해서는 표현이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감시의 손길은 멀리 떨어진 미국에까지 뻗쳐 있었다고 한다. 일제는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영사관과 또 교포 사이에 밀정을 심어 반일 성향 민족주의자나 애국인사들의 동태를 일일이 탐지하고 있었다.



아국미국 됴하하나 / 우리나라 이아니라 

어느때나 성공하여 / 깃붐으로 도라갈고 

어서밧비 속량하고 / 고향산천 만나보세 

죽엇스면 죽엇지오 / 덕국노예 못되겟네

「단가(短歌)」, 1909. 7. 7. 


당시 우리 동포들은 선진 문명국에 대한 동경을 품고 유학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이역만리 미국까지 떠나갔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현실은 약속과 달랐다. 동포들은 가혹하게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 현장에 내몰리게 되었다. 때문에 이들의 작품에는 고향산천에 대한 그리움과 식민지 노예로 전락되어 유랑하는 망국인의 처참한 상황이 절절하게 담겨져 있다.



까닥까닥 게다신고 / 깜실깝실 더기간다

어셔오계 동무들아 / 무셔말아 원수놈을 

뎌기가는 뎌놈들이 / 멸망한다 우리나라 

(중략)

하여보셰 하여보와 / 싸홈한번 하여보셰 

입에잇는 옥춘당도 / 뎌놈들이 가져왓지 

먹지마셰 데놈의것 / 아니먹어 못사는가 

지각업는 뎌어른은 / 왜권연을 북북빠라 

애해아하 붓그러워 / 더러케도 철이업나 

우리들은 자란뒤에 / 대대쟝이 될터이다 

사열사격 도라좌편 / 서셔견양 군인들아 

만세만세 만만세야 / 태극국기 만만셰야

철각생  「아히들 노래」, 1909. 10. 20. 


항일 민족시가에는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저항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당시 국내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표현들이 해외 동포의 작품에서는 거침없이 토로되고 있었다. 후반부에 등장한 일본산 사탕인 ‘옥춘당’과 일제 담배 ‘왜권련’에 대한 불매운동을 통해 교포들에게 민족 주체의식을 심어주면서 ‘태극기 만만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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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옥춘(왼쪽)과 옥춘당(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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