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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들의 동력이 되어준 

독립운동 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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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동언(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소장)



한민족은 일제의 탄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경제적인 여력 없이는 독립운동을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은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군자금, 독립운동 자금 등 다양한 형태로 모금되고 지원되었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정부 운영과 독립운동 단체 지원을 위해 독립공채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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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을 막기 위한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민족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예가 많다. 그중 의미 있는 기록으로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발의되어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이 있다.

1907년 일본의 국채 1,300만 원을 상환하지 못하면 조선의 강토는 필경 일본의 영유가 되고 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은 세입 총액 1,318만 9,336만 원, 세출 총액은 1,395만 523원이었다. 당시 국채 1,300만 원은 대한제국 정부 예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1,300만 원의 국채를 상환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전 국민이 하나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이 힘을 합하여 일본에 진 빚 1,300만 원을 갚아 일제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지키자는 국권수호운동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발의되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문회(文會) 특별회에서 회원 서상돈(徐相敦)과 김광제(金光濟) 등이 발의하여 시작되었다. 먼저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가 발기 연설을 하였다. 서상돈의 발의에 참석한 대구광문사 문회 특별회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찬동하고 김광제가 발기 연설을 마친 후 당장 실시할 것을 주창하였다. 이어 자신의 연죽과 연갑을 버리고 3개월 치 담뱃값 60전과 의연금으로 10원을 내자 모두들 동참하여 2천여 원이 모금되었다. 국채보상 발기문과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보면, 전 국민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어 일본의 국채 1,300만 원을 갚자고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담배는 당시 한국에 이주해온 일본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는 대표 상품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국채보상운동은 당시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만세보』·『제국신문』 등 언론의 지원을 받아 연일 보도되었고,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당시 신문을 보면 국채보상 의연금 명단이 신문 지면을 메우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신분·계급·성별·직업·종교·사상 등 모든 것을 뛰어넘어 국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여성들의 참여가 많았고, 그들은 반지나 비녀 등의 패물을 국채보상 의연금으로 내어놓았다.


국권 회복을 위한 군자금과 독립운동 자금 

오늘날 ‘군자금’과 ‘독립운동 자금’ 용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이고 있다. 군자금의 사전적 의미는 ‘군대의 운영과 군사 행동에 필요한 모든 자금’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군의 자금을 말한다. 독립운동 자금의 경우 ‘독립운동을 위한 모든 자금’을 뜻하며 포괄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 측 보고서를 보면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거나 발각된 개인이나 단체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군자금이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일은 비밀리에 추진되었기 때문에 이를 입증하는 자료나 문서가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다. 남아있는 자료 중 군자금의 경우 1921년 1월 서로군정서에서 군자금을 낸 이종식에게 발행한 영수증이 있다. 그밖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회고록이나 증언을 통해 언급되고 있는 정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개인이나 단체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상하이로 보내왔다. 미주를 비롯하여 중국, 러시아 등지에 사는 동포들도 푼푼이 모은 돈을 보냈다. 특히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로 이주한 한인 노동자들은 사탕수수밭에서 힘들게 번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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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민의소에서 발행한 국채담보금(국채보상헌금) 영수증(왼쪽) /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비(오른쪽)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공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임시정부의 존립을 위해 인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재정적 부분이었다. 임시정부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하이에 도착하는 인사들이 가진 자금과 국내에서 보내온 자금으로 간신히 버텨오다가, 안창호가 부임하면서 미국에서 가져온 자금을 투입해 임시정부 운영에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 임시정부는 안정적인 방안을 찾아갔다. 대내적으로는 인구세와 애국금을 모집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에 공채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1919년 9월 재정제도와 운영체계를 마련해 주로 인구세를 조세수입으로 애국금을 조세 이외의 주 수입원으로 삼았다. 이 중에서 애국금은 1920년 4월부터 독립공채로 대신하게 되었다.  

독립공채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1920년 4월 17일부터 판매한다고 공포하였다. 최초의 독립공채는 1919년 8월에 이미 발행하였고, 1919년 9월 1일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과 이승만 명의로 공채를 공식 발행해 판매하였다. 상하이에서는 원화표시 채권을, 미주에서는 달러표시 채권을 발행하였다. 원화채권 액면가는 100원, 500원, 1000원 3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 이시영 직인이 찍혀있고 발행 금리는 연 5%였다. 

독립공채 원금은 우리나라가 독립한 뒤 5~30년 이내 수시로 상환하기로 하였다. 달러채권은 액면가가 10$, 25$, 50$, 100$, 1000$ 등 5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명의로 발행하였고, 발행 금리는 연 6%였다. 독립공채는 국내 비밀 행정조직인 교통국과 연통제를 통해 모집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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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군정서에 군자금을 낸 이종식에게 발행한 군자금 영수증(1921. 1.)


승려들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

승려들은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통해 불교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연결하여 불교의 민족의식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유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불교계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환시키려고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범어사의 김상호·김상헌·김석두가 원로인 이담해·오성월·김경산·오리산 등이 모금해 준 독립운동 자금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담해·오성월·김경산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인물로 항일승려 백초월을 들 수 있다. 백초월은 3·1운동 직후 서울로 와서 중앙학림에 독립운동단체인 민단본부를 결성하였다. 그는 중앙학림 학인이었던 정병헌·신상완·백성욱을 천은사·화엄사·쌍계사 등의 승려들에게 파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게 하였다. 백초월은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을 불교계 루트를 통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1919년 5월 해인사 승려인 김봉율·박달준·강재호·송복만·손덕주·박덕윤·이창욱·김장윤, 그리고 대흥사 승려인 박영희는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남만주 서로군정서 영수증을 소지하고 김룡사·고운사·범어사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그 외 김상헌은 상하이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8월 독립운동 자금 모금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하여 철원애국단을 조직하고 함경남도 지역에서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창호에게 송금하기도 하였다. 또한 함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이범대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동지 포섭을 위해 해동불교청년회를 결성하여 만주의 대한독립단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통도사 주지 김구하는 1919~1920년 사이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창호 국무총리(5,000원), 혁신공보 백초월(2,000원), 이종욱에게 군자금(3,000원) 등 총 13,000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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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 1000원(왼쪽) / 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 100달러(오른쪽)


백초월(白初月)은 승려로 있는 몸인데 불구하고, 항상 불온사상을 품고 국권 회복을 몽상하여 은근히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던 중, 금년 봄 소요(騷擾) 발발한 이래 해외 동포는 조국의 부흥을 위하여 혹은 러시아, 또는 중국 영토에서 독립군을 일으키고, 또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등 오직 독립운동에 활약하고 있으며 선내(鮮內)에 있어서도 예수교 및  천도교들은 매우 이에 원조를 하고 있으나, 다만 불교도(佛敎徒)만은 이에 무관심하고 있음을 크게 유감지사로 생각하여, 금년 4월 경성에 들어와 시내 각처에 잠재하면서 우선 불온  문서를 간행하여 인심을 교란시킬 계획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단체를 경성 중앙학림(中央學林) 내에 설치하여 스스로 민단부장(民團部長)이 되어 자금과 부원 모집에 분주하였으며….(생략)

김정명, 「독립운동 자금 모집자 검거의 건」 1919.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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