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몽골의 침략과 대치

몽골의 침략과 대치
글 김종성 역사작가


몽골의 침략과 대치



이 땅을 침략한 이민족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것은 칭기즈칸의 몽골족이다. 이들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몽골 초원의 통일로 강력해진 이들은 동유럽과 동아시아를 잇는 초원을 말 달리며 유라시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런데도 몽골족은 고려 땅에서는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용맹한 기세로 반격한 고려

몽골 기병대는 지독하게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이들의 말발굽이 지나간 곳이라면 주민들은 물론 도시와 가축까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일이 많았다. 

북중국과 만주에 걸쳤던 금나라 영토에서 1207년에 약 768만 호이던 호구 수가 몽골 침략 이후인 1230년대에 약 100만 호로 급감한 것은 몽골의 잔혹한 학살에 기인한다. 1호당 식구가 3~6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중국에서 희생됐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국가가 호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1230년대 실제 호구 수는 100만 호보다 많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전 세계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몽골인들을 의아하게 만든 민족이 있다. 바로 고려다. 고려는 42년 동안 몽골과 싸웠다. 몽골이 제1차 침공을 일으킨 해는 1231년, 특수부대 삼별초가 끝까지 저항하다가 고려 왕실과 몽골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된 해는 1273년이다. 이 기나긴 세월 동안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국체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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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전쟁 상상화』(전쟁기념관 소장)



몽골군과 해양에서 대립하다

몽골의 침략이 개시되자 무신정권 지도자 최우는 개경에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개경에서 가까운 바다에 항전의 거점을 마련하고 유목민이 친숙하지 않은 물 한가운데서 임금의 신병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유목민이라고 해서 해양을 무조건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몽골군은 삼별초가 진압된 뒤인 1274년과 1281년에 고려군과 함께 일본 원정을 단행했다. 결국 실패했지만 이 일은 유목민과 해전이 마냥 동떨어진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몽골군은 1283년에 오늘날의 홍콩이 있는 광동(광둥) 지방에서 배를 타고 베트남 남부인 참파왕국에 상륙해 수도 인근을 점령했다. 현지 게릴라 부대를 감당할 능력이 없어 오래 주둔하지는 못했지만, 1283년 당시의 몽골군은 마치 해병대 상륙부대처럼 남중국해(난지나해)와 인도차이나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1232년은 몽골이 해양으로 눈을 돌릴 여력이 많지 않은 때였다.


전쟁 중에 불경을 조각하다

고려인들이 신앙을 매개로 국론을 통합한 것도 국난 극복에 기여했다. 몽골 대군을 목격한 고려인들은 이 국난을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 사업에 착수했다. 무신정권과 불교계는 ‘외적을 물리쳐 달라’는 소원을 담아 81,258개의 목판을 새겼다. 전쟁 중에 이런 사업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인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도 과학적인 사고를 했다. 그들이라고 해서 목판에 새겨진 글자 자체가 신령한 힘을 발휘해 외적을 물리칠 것이라고 기대했을 리는 없다. 그런 미신적 사고를 품고 있었다면 애당초 강화 천도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정권과 불교계가 합심해 목판을 새기며 기원하는 모습은 백성들의 마음을 통일하고 그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는 효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전쟁 중에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만큼 필승의 길도 없을 것이다. 팔만대장경 사업은 그런 효과를 낳을 만한 일이었다. 

대장경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글자 하나를 새길 때마다 정성껏 절을 올렸다고 한다. 세계 최강국의 침입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서도 이런 ‘태평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당시의 고려인들이 고도의 침착성과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비상 상황에 임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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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과 몽골군의 복식』에 나타난 몽골군의 복장(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결사항전

유라시아 최강의 군대를 무서워하지 않고 그 속으로 용감히 돌진하며 목숨을 내버리고 싸우는 이들이 있었다. 제1차 침공이 있었던 1231년부터 이런 이들이 몽골군을 교란했다. 

그해에 몽골군은 희한한 상황을 목격했다. 누구라도 몽골군을 보면 멀찍이서 달아나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몽골 대군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소수의 특공대가 있었다. 몽골군은 별다른 제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이 상황이 『고려사』 김경손 열전에 묘사돼 있다. 김경손은 고작 12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대군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몽골군을 두 차례나 퇴각시켰다. 

이들은 지금의 평안도 국경지대인 정주성과 귀주성에서 몽골군을 괴롭혔다. 성 안에서 몽골군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게 아니라 성 밖으로 나가 교란 작전을 펼쳤다. 귀주성의 경우에는 이 특공대 때문에 퇴각했던 몽골군이 다시 돌아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했지만, 김경손의 고려군이 20일 이상 대항한 끝에 결국 막아낸 일이 있었다. 몽골군은 이 성을 포기하고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전투 중에 김경손은 포탄이 이마를 스쳐가는 부상을 입었다. 부하들이 “자리를 피하시라”고 권했지만 “내가 움직이면 병사들의 마음도 움직인다”며 거절했다. 그는 부상 중에도 신출귀몰한 전법을 구사했고, 몽골군마저 “사람이 아니다”라며 감탄했다. 이런 활약은 고려군 전체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이 부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단서가 있다. 그것은 김경손이 항상 검정 옷을 입었다는 김경손 열전의 기록이다. 검정 옷 즉 조의(?衣)를 입거나 검정 허리띠를 착용한 사람들은 고구려 수행자 군단인 조의선인(?衣仙人)이나 신라 수행자 군단인 화랑을 계승하는 후계자들이었다.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절단이 작성한 『고려도경』이란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 불린 이들은 평소에는 일반인처럼 생활하다가 비상시에는 전투에 자원했다. 이들은 일반 농민과 달리 평시에도 군사훈련을 받으며 종교적 사명감으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몽골군이 이 땅에 침입한 이후 벌어진 일들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고려 조정이 섬으로 들어가 육지를 지배하며 장기간의 항전체제를 갖추더니 그곳에서 전쟁 지휘뿐 아니라 불경 조각까지 했다. 전쟁 중임에도 불경을 한 글자 새길 때마다 절을 올렸다. 육지에서는 정규군이 아닌 소수의 수행자 군단이 몽골 진영을 교란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몽골군이 보기에 고려 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바로 그 ‘이해할 수 없음’이 고려가 세계 최강과의 전쟁에서 40년간이나 버텨낸 원동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