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자유주의자 이회영과
워킹맘의 선구자 이은숙

자유주의자 이회영과 <BR />워킹맘의 선구자 이은숙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자유주의자 이회영과 

워킹맘의 선구자 이은숙



애국계몽운동단체인 신민회의 회원이었던 이회영은 전 재산을 정리해 남만주(서간도) 류허현에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여 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여사 또한 반세기 넘도록 만주와 중국을 전전하며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한 부부는 죽는 날까지 빈곤과 싸우며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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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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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숙 여사(우당기념관 제공)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서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는 ‘국제적인 미아’ 신세였다. 제국주의 열강은 저들의 탐욕스러운 본질을 숨긴 채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을 묵인했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자화자찬하던 이 땅은 통곡 소리가 만연한 분위기였다.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던 한국인들은 이를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괴로운 현실이었다. 재야 지식인과 전·현직 관료들의 순국과 자정에도 현실을 되돌리기에 역부족인 안타까운 메아리가 되었다. 그러나 중장기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독립국가를 꿈꾸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의 피눈물 나는 열정과 노력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일꾼 에너지원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왜놈 치하에서 구차한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굴욕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이다. 그는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하여 신민회 동지들과 더불어 광활한 만주벌로 향했다.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비장한 각오는 다음 글에서 돋보인다. 


“삼천리 기름진 강토는 도둑의 이빨에 씹혀 삼킨 바가 되었다. 반만년 신성한 한민족은 검은 잠방이의 야만족에게 노예가 되었으니 이는 천추에 치욕이요, 억울하고 분통할 뿐이다. 우리 이천만 동포는 총궐기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왜적에 분투하여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


시세 변화에 부응한 사회질서를 모색하다

을사늑약을 전후로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전·현직 관료나 재야세력은 순국이나 의병운동과 상소운동으로 이를 저지하는데 나섰다. 의지와 달리 일제의 회유와 억압은 너무나 집요했다. 사태를 관망하던 우당도 벼슬을 버리고 국권 수호에 몸을 던질 것을 단호하게 결심하였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동지들을 만났다. 인연은 변화에 부응하려는 인식 변화로 이어졌다.

아전과 노비 등을 인격체로서 존대하는 동시에 신분 해방에 대한 관심과 실천에 앞장섰다. 적서 차별을 없애고 여성들 재혼을 장려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누이를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가 주선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파격적이다. 찬반이 비등하는 상황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1908년 자신도 상동교회에서 이은숙과 재혼했다. 전통 명문가 출신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자체만으로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기득권을 부정하고 오로지 평등한 사회 실현에 온 몸을 던졌다.

치열하게 전개되던 의병전쟁이 점차 위력을 상실하자 신민회 동지들과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헤이그평화회의에 참석한 뒤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한 이상설을 찾아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다. 대성학교·오산학교·협동학교 등에 인재를 양성할 적임자를 배치하는 한편 자신은 상동청년학원 학감이 되었다.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이 충만한 청소년 육성은 향후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


전 재산을 조국 광복에 투자하다

이회영 형제는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이자 관료인 이항복의 후손이다. 19세기 말기 이조판서·의정부 참찬 등을 지낸 이유승(李裕承)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조판서 정순조의 딸이었다. 이른바 명문인 삼한갑족(三韓甲族, 대대로 문벌이 좋은 집안-필자주) 출신으로 돈독한 형제간 우애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유원 양자로 들어간 이석영은 양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나선 형제들에게 흔쾌히 제공하였다. 이회영의 부인인 이은숙(李恩淑)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는 망명 준비를 이렇게 회고했다. 


“여러 형제분이 일시에 합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부동산을 방매(放賣)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극난하리오.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 집이 예전 대가(大家)의 범절로 남종 여비가 무수하여 하속(下屬)의 입을 막을 수 없는 데다 한편 조사는 심했다.”


급매하다 보니 제값도 받을 수 없었다. 전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40여만 원으로 현재 돈으로 약 60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형제 중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은 단연 우당이다.

형인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과 아우인 시영(始榮)·호영(護榮) 가족과 심부름꾼 등 모두 60여 명이나 되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북행길에 올라 무사히 압록강을 건넜다. 몰아치는 칼바람은 애간장 녹일 만큼 비수처럼 다가왔다. 그렇다고 중단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내몰렸다. 목적지를 향하여 묵묵히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난관을 뚫고 일가는 류허현 삼원보 부근 추가가에 외로운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유사시 피신에 좋은 지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 훈련과 농사일을 함께 할 수 있는 환경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상룡·김대락·김동삼 등 수많은 민족 지사들도 이곳으로 몰려왔다.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선적인 과제는 자치단체인 경학사 조직과 신흥강습소 설립이었다. 경학사는 이주 한인들 생활안정과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등 한인사회 대동단결에 있었다. 중국정부의 부당한 간섭이나 수탈로부터 이주한인 보호는 궁극적인 취지였다. 우당은 중국 정부와 교섭을 통하여 한인들 토지소유권을 확보함으로 경제적인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동시에 중국인 옥수수 창고를 빌려 조촐한 개교식을 거행함으로 신흥무관학교 개막을 알렸다. 난공불락인 요새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노력은 결실로 이어지는 벅찬 감격적인 순간을 맞았다. 하지만 중일 양국의 관계 변화에 따라 ‘위험한 외줄타기’는 일상사였다. 난관을 극복하는 슬기로운 지혜는 한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에너지원이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우당 형제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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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6형제 망명 직전 회의 장면 초상화(우당기념관 제공)



자유와 평등을 향한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3·1운동 열기는 국내외 한인사회로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국제도시 상하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중심지나 마찬가지였다. 이회영은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망명정부보다는 독립운동을 이끌 항일운동단체가 현실적으로 필요했다. 시대와 정세가 변했으니 이에 따른 운동론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강고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한인들 대동단결은 우선적인 과제였다.

우당은 “정부라는 조직과 근본적으로 다른 운동단체를 결성하자”라고 주장했다. 임시정부 조직 과정을 지켜보면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인식 변화는 상하이 생활을 접고 베이징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기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평생 동지인 동생 이시영이나 동지 이동녕과 길을 달리한 배경은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위의 권고에도 오직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베이징에서 생활은 전혀 새롭게 전개되었다.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패권을 추구하는 공산주의를 비판하였다. 상호부조를 위한 농민운동과 함께 구미의 정치제도에 대해 동지들과 많은 토론을 벌였다. 중국 뤼쉰(魯迅)이나 러시아인 에로센코 등과 자주 만났다. 소통과 교류는 국제적인 안목을 배가시키는 든든한 자양분이었다. 혁명을 꿈꾼 한인 청년들은 그의 사랑방으로 운집하였다.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한 노력은 옳은 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신채호·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를 위해 이상촌 건설에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경제적인 곤궁으로 은거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새로운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하던 그는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조직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비밀리 만주로 가는 도중 따롄수상경찰서에 붙잡혀 모진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한 혁명가의 꿈이 좌절되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당의 꿈꾼 세계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룬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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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류허현 삼원보



『서간도시종기』, 독립운동가의 인생 항로를 알리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이 쓴 육필본으로 7년 만에 탈고하였다. 역사적인 사료와 더불어 수필문학으로서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남편인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주변인들의 행적을 꼼꼼하게 되짚어볼 수 있다. 특히 서간도로 이주하는 경로와 상황 등에 관한 기록은 백미 중 백미이다. 정정화 《장강일기》, 최선화 《제씨일기》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가들 일상사는 이를 통하여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였다. 

이은숙은 1889년 8월 8일 충남 공주에서 한산이씨 이덕규와 남양 홍씨의 외동딸로 출생했다. 1908년 우당 이회영과 상동교회에서 결혼한 후 1910년 식솔들과 함께 만주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1925년 홀로 국내로 돌아와 공장을 다니고 삯바느질을 하면서 생활비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에 나섰다. 이회영 순국 이후 독립운동을 하던 아들 규창이 투옥되자 옥바라지를 하다가 신베이로 이주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 지원에 바쳤다. 독립운동가의 동지이자 아내로서, 어미로서 고단한 삶의 무게에도 전혀 좌절하지 않은 삶의 전형이었다. 이를 통하여 구술사와 삶의 궤적에 대한 기록이 정신적인 유산임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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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도시종기』(우당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