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독립군 승리 뒤에 가려진
일제의 대학살

독립군 승리 뒤에 가려진<BR />일제의 대학살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독립군 승리 뒤에 가려진

일제의 대학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간도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본군과 처음으로 맞붙어 최초의 승리를 거뒀다. 그 뒤에는 목숨을 내던진 독립군들의 굳센 각오뿐만 아니라 이주한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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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학살 희생자 추모탑



만주의 독립군들

연해주에 살던 홍범도는 1937년 소련 정권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고 그곳에 묻혔다. 이 또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함에도 잊고 지나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전투에서의 승패는 지휘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만, 병사들의 희생과 그들을 도운 민간인들의 공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 만주에 수많은 독립군이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1860년대 이후 만주로 이주하여 삶의 터전을 일군 한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10년 8월 국치 이후 만주는 국내에서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던 독립운동가들이 그곳으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기지로 변모하였다. 이들에 의해 만주에 수많은 민족학교가 설립되어 민족정신이 고양되었고 3·1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후 독립군 부대가 조직된 것이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임시정부는 “일제로부터 민족 해방과 조국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승리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바른길이며,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지구(持久)하기 위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자”고 호소했다. 

독립군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벌여 일제에 타격을 가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인 면사무소·경찰서·헌병분견소·주재소를 습격하거나 친일파들을 처단하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 제88호(1920년 12월 25일)에 따르면 이렇다. 1920년 3월부터 6월 초까지 독립군이 국내에 진입하여 유격전을 벌인 것이 32차례였고, 일제 군경들의 관서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고 한다.


일본군의 한인 학살

일제는 장쭤린(張作霖) 만주 군벌까지 끌어들여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규모 정규군을 만주에 투입하여 만주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에 매수된 중국 마적들이 훈춘 주재 일본영사관을 불태우고 시부야(?谷) 경부의 가족 등 일본인 부녀자 9명이 살해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20,000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만주로 진출시켰다. 그런데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 작전을 추진하던 중 되레 청산리전투에서 두 번째 패배를 맛봤다. 그 뒤 일본군은 보복 차원에서 간도의 한인 가옥·학교·교회 등에 방화를 저지르고 약탈하였으며 3,700여 명의 한인을 잔혹하게 죽였다. 그 결과 독립운동기지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본군의 잔악상은 간도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자행되었다. 1917년 11월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에서는 혁명 세력인 볼셰비키 적군과 반대파 백군 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당시 백군을 지원하던 일본군은 적군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1920년 4월 일본군은 적군에 가담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한다며 무기를 압수하고 가택 수색을 자행하며 검거에 나섰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이 탈출한 뒤였다. 

그런데도 일본군은 신한촌에 살던 무고한 300여 명 이상의 한인들을 체포한 뒤 학교 교실에 가두고서는 불태워 죽였다. 신한촌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일본군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아 적지 않은 우수리스크의 한인들도 희생을 당했다. 이때 연해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최재형도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두 사건을 흔히들 ‘경신참변(혹 간도참변)’, ‘4월 참변’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참변’이란 사전적 의미가 ‘뜻밖에 당하는 끔찍하고 비참한 재앙이나 사고’를 일컫기 때문이다. 두 참변 모두가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불행한 사고’가 아니다. 이는 명백히 일본군이 계획적으로 가혹하게 한인들을 죽인 ‘학살’이다. ‘간도학살’, ‘연해주학살’이란 표현이 적절하다고 본다.


간도·연해주 한인들을 추모하며

이들의 희생을 기리고자 간도학살 당시 가장 피해가 컸던 연길현 용지사 장암동 뒷산에 희생자들의 묘와 ‘장암동참안유지(獐岩洞慘案遺址)’라는 비석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에는 러시아어로 “1920년 4월 4일부터 5일간 악조건을 무릅쓰고 간섭군(연합군)에 의해 빨치산 240명이 희생되었다”라고 새겨진 추모탑이 있다. 이는 간도학살과 연해주학살을 보여주는 비석과 추모탑이지만, 장암동에 국한된 것이고 한인만을 기리는 추모탑이 아니다. 더욱이 가장 피해가 컸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렇다 할 추모비 하나 없다. 

올해 6월에도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여러 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국내 어디에도 독립군으로 활동하였지만 이름 없이 숨졌거나 독립군을 지원하여 학살된 간도나 연해주 한인들을 기리는 추모비나 기념비는 없다. 

100년 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승리에 빛을 더한 것은 이들이며, 이들 또한 독립운동가다. 이제 빛나는 승리를 위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달래 줄 추모비나 기념비를 중국이나 연해주에 세울 수 없다면 대한민국 어느 한 곳에 하나쯤은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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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동참안유지(獐岩洞慘案遺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