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역사

러시아에서 조직된 항일의병부대
13도의군

러시아에서 조직된 항일의병부대 <BR />13도의군

글 엄찬호 의암학회 회장, 강원대학교 아카이브센터 연구교수


러시아에서 조직된 항일의병부대

13도의군



13도의군은 일제의 침략을 결사항전으로 막고자 하였던 의병들이 연해주에서 조직한 통합 군단이다. 1910년 7월 27일 연해주에서 ‘13도의군’이 결성되었고, 류인석이 도총재로 추대되었다. 통합 군단으로 편성된 13도의군은 대일항쟁을 위해 의병을 모으고 의병 명부를 작성하였으며 무기 구입에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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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류인석 영정



한인의 연해주 이주와 의병

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3년 겨울 함경도 농민 13호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구로 동해 연안 지방) 남부 지신허강 계곡에 정착하면서부터다. 그 뒤 1869년에 대흉년이 들면서 함경도 육진의 농민 6,500여 명이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의 몸부림으로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정착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한인의 이주를 환영하는 편이었다. 연해주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고 개발이 절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러시아는 ‘러시아인을 위한 러시아’라는 구호 아래 극동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러시아인의 연해주 이주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었다. 연해주 지역에서 러시아인의 정착이 많이 늘어나는 가운데 한인들의 이주도 꾸준히 증가해 1908년경에는 이 지역 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한인사회를 키워나갔다.

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으나, 품삯을 벌기 위해 온 떠돌이 임금노동자나 납품업자들도 있었다. 그중 ‘뽀드라치크’라 불린 납품업자들은 러시아 군대와 관청에 쇠고기, 벽돌 등의 납품과 군부대시설 공사를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축적된 자본은 항일투쟁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한인사회의 지도자 최재형은 일찍이 연해주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의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구국의 뜻을 펼쳐 나갔다.

한인사회의 형성과 함께 연해주 지역은 1910년 일제의 한국병탄을 전후해 해외 독립운동기지로 발전해 갔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지리적 이점과 북간도 지역보다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덜 미치던 연해주 지역은 독립운동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러일전쟁 직후 간도 관리사였던 이범윤이 이곳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시작하였고, 하얼빈 거사를 일으킨 안중근 의사의 동의단지회 결성도 연해주의병이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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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석 유묵 ‘위국투쟁’




류인석의 연해주 이동과 13도의군

전기의병기에 호좌의병을 이끌고 중부내륙지역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던 류인석은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 연해주 망명을 결심하였다. 그는 일련의 국권 침탈 사건으로 일제의 침략이 극에 달하였다고 인식하여 더는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류인석은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모색하여 연해주로 망명하게 된 것이다.

류인석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 연해주의병들의 근거지였던 연추(크라스키노)의 중별리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연해주의병의 국내 진공을 지원하고 ‘의병 규칙’ 등을 제정해 항일의병의 전열을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연해주의병은 1906년 초 이범윤이 휘하 충의대를 이끌고 연해주로 망명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최재형이 연해주 한인들로 하여금 이범윤부대에 의복과 식량 등을 제공할 것을 요청하는 신임장을 제공하고 의병을 도와주도록 권유하였다. 이렇게 이범윤은 최재형의 후원으로 연해주에서 의병진을 재편한 후 관북변경지역의 의병과 연계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따라서 류인석은 이들과 연계함으로써 항일 전선을 공동으로 구축하기 위하여 연추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류인석이 연추에 도착하던 무렵에는 국내 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최재형과 이범윤 사이에서도 항일투쟁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야기되어 항일투쟁이 일시 소강상태인 시기였다. 이에 류인석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며 새로운 항일투쟁 방략을 마련하는 등 항일의병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대규모 항일전 수행을 계획하였다. 

즉 류인석은 국내외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분산되어 있던 항일무장세력을 하나의 단체나 군단으로 통합시켜 합일된 민족의 힘으로 항일전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류인석의 의병 통합 구상은 그가 1908년 가을에 작성한 ‘의병 규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중 의병편제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각 읍마다 의리가 있고 처신이 바른 인물을 뽑아 읍총재로 삼아 그 진장을 지휘하게 하고, 각 도마다 덕망과 신의가 높아 한 도의 영수가 될 만한 자를 도총재로 삼아 도통령과 열읍의 총재를 관할하게 하며, 몇 명의 규찰을 파견하여 도내의 여러 진을 돌며 살피게 한다. 도통령과 열읍 총재는 그 지휘를 받아 어겨서는 안 된다. 또 여러 도에서 충의와 성심, 역량이 있고 덕망과 지위가 족히 13도의 인심이 열복할 만하고 거기에 향응할 수 있는 인물을 추대하여 13도도총재를 삼아 도통령과 각 도총재를 관할하게 한다. 도통령과 각 도총재는 그의 절제를 받아 감히 어기거나 틀려서는 안 된다. 도통령은 도총재에게 절제를 받아 도통령을 절제하고, 도통령은 각 읍의 진장을 절제함에 감히 어기거나 틀리게 해서는 안 된다.


전국의 의병을 13도 도총재를 정점으로 하여 총재와 실제 지휘관인 통령의 이중 편제로 설정하도록 한 규정이다. 이 이중 편제는 ‘총 단위’와 ‘도총재’를 정점으로 한 13도의군의 편성 세목을 규정한 ‘의무 유통’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기틀 위에 항일투쟁을 수행하고 국내 진공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외의 모든 의병이 같은 작전과 하나의 지휘 아래 움직일 수 있는 통합 의병기구가 요구되었다. 이에 류인석은 ‘의무 유통’을 제정하여 13도의군의 추진 계획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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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석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발표한 격문 『격고팔도열읍』 중 일부




연해주에서 결성된 13도의군

류인석은 헤이그 특사로 활동한 바 있던 이상설을 위시하여 이범윤, 이남기 등과 의논하며 연합의병 조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10년 7월 27일 연해주 재구(차피고우)에서 ‘13도의군’이 결성되었고 류인석이 도총재로 추대되었다.

13도의군의 조직편제로는 창의총재에 연해주와 간도에서 활약하던 이범윤, 장의총재에 함경도 의병장이던 이남기를 임명하여 창의군과 장의군으로 편제하였다. 그리고 도총소참모에 황해도 의병장이던 우병열, 도총소의원에 삼수·갑산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홍범도와 황해도 의병장이던 이진룡이 임명되었다. 나아가 국내에서 신민회를 주도하던 애국계몽계열의 안창호와 이갑까지 의원으로 참여하였고, 이상설은 외교 대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 조직에 있어 고을마다 총재·통령·참모·총무·소모·규찰·통신 등의 직책을 두어 전 민족이 단일 조직으로 계통화할 수 있도록 하였다. 

13도의군이 결성된 후 도총재 류인석은 격문을 국내·외에 발송하여 전 국민의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경성 내외 13도열읍대소동포’를 수신자로 하여 발송된 ‘통고13도대소동포’는 시국 상항과 13도의군의 설립 과정에 대해 언급하고, 국민에게 의병 봉기를 촉구하면서 특히 국내 임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당부하였다. 류인석은 전 국민이 의병 봉기에 참여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생각건대 일제 적의 무리가 매우 강하니, 1,000여 명의 의병으로는 일제에 대항하여 국권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합니다. 반드시 2,000만 동포가 일심 일력을 이루고 함께 죽을 각오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종사·강토·도맥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통합 군단으로 편성된 13도의군은 대일 의병항쟁을 위해 다각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다. 곧 13도의군은 의병항쟁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청국과 러시아에 사람을 파견하여 의병을 모으고 의병 명부를 작성하였으며, 무기 구입에 주력하였다. 창의총재 이범윤은 연해주의 포셋트만 부근에서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였고, 러시아 유력가로부터 무기를 사들여 간도·온성·종성을 경유, 경흥·웅기 방면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또한 도총소의원 홍범도는 총기 500~600여 정을 사들이고 의병 1,000여 명을 모집한 후 8월 하순에 국내 진격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3도의군이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하기도 전 우리나라는 일제에 병탄되고 말았다. 일제는 한국병탄을 단행한 이후 가쓰라를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하여 한인의 항일투쟁에 대해 러시아 정부에 엄중히 항의하고 아울러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여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당국은 1910년 9월 11일 이상설·이규풍 등 13도의군 간부 20여 명을 체포하였다. 류인석은 이러한 러시아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사전에 피신하였고, 이범윤도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결국 10월 22일 붙잡혀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13도의군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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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총소의원 의병대장 홍범도



13도의군 결성지는 어디일까

13도의군 결성지에 대하여 류인석은 ‘재구’에서 결성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러시아 지명을 중국어로 차음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러시아 측 자료에는 13도의군의 결성지를 ‘암밤비’라고 하였다. 결성지명이 이처럼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재구가 암밤비의 행정 구역에 속한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실제 재구에서 13도의군이 결성되었지만 러시아 측에서는 행정 지명상 이를 암밤비로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현대화 과정에서 지명 변화가 몇 차례 이루어져 현재 러시아의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지 불분명하다. 

대한제국 말 스러져 가던 나라를 구하고자 이국만리에서 끝까지 구국항쟁을 준비하던 13도의군은 우리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그 결성 장소를 찾기 위한 작업이 독립기념관을 비롯하여 몇몇 학자들에 의하여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아직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못하였다. 

현재까지의 조사를 바탕으로 추정해 본다면 1937년도에 제작된 일본군 정보지도에 표기된 차피고우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는 차피고우와 함께 ‘마리코지나’라는 지명이 병기되어 있는데, 이 ‘마리코지나’는 ‘말루지노’의 일본식 표기로 생각되고 러시아 현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말루지노는 현재 마루문카 강과 보로딘스키 강이 합류하는 곳이라고 한다. 따라서 현재 13도의군의 결성지로 추정되는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크라스키노로 가는 도로 중 베르고보예 마을로 들어가는 중간 마루문카 강 일대의 분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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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13도의군도총재 류인석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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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창의총재 이범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