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구미위원부의
설립과 활동(Ⅱ)

구미위원부의 <BR />설립과 활동(Ⅱ)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구미위원부의 설립과 활동(Ⅱ)


Ⅳ. 3·1운동의 이후 재미 한인사회의 변화 ②


구미위원부의 주요 활동

구미위원부가 결성되던 1919년 8월은 3·1운동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가 집중되어 친한 동정여론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될 때였다. 이런 때에 미 의회는 1919년 6월 30일 스펜서(Selden P. Spencer) 상원의원에 의해 처음으로 한미관계의 입장을 국무부에 질의하는 결의안(제101호)을 제출하며 한국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구미위원부는 3·1운동 직후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미 의회를 상대로 적극적인 교섭활동에 나섰다. 여기에는 법률 고문 돌프(Fred A. Dolph)와 선전원으로 활동한 헐버트(H. B. Hulbert)와 벡(S. A. Beck)의 활약이 컸다. 1920년 3월 미 의회는 한국과 아일랜드에 대한 독립동정안을 상정했는데 한국독립동정안이 34 대 46으로 아쉽게 부결되기도 했다. 상하이의 <독립신문>은 ‘미국 상원의 한국독립승인안’이란 논설(1920.3.30)에서 “국치 10년 이래 언제 한국문제가 세계의 여론에 오르내렸더뇨”라며 미 의회에서 한국독립문제가 상정된 데 대해 감격했다. 

그 밖에 구미위원부는 미국 각지의 한국친우회를 결성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다른 무엇보다 구미위원부가 중점을 둔 활동은 독립공채 발매를 통한 재정 수합과 수합한 재정을 임시정부 유지를 위한 지원을 비롯해 필라델피아와 파리의 한국통신부와 런던사무소의 선전활동을 돕는 데 사용했다.


구미위원부의 내부 갈등

김규식이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1919년 8월부터 1920년 9월까지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이 간섭하고 주도했다기보다 김규식이 거의 모든 일을 주도했을 정도로 그에 의해 운영되었다. 즉, 김규식은 재정을 모금하는 일과 모금한 자금을 운용하는 일에 이승만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처리했다. 이승만이 명목을 밝히지 않고 쓴 돈에 대해선 공사를 물어 지출 원칙을 지켰고 수합한 재정의 약 절반은 반드시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것은 구미위원부가 임시정부의 한 기구라는 점을 인식한 김규식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정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이 설립한 구미위원부가 김규식의 주도하에 운영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것은 구미위원부를 설립한 이승만의 당초 의도와 어긋나는 일이어서 두 사람 사이에 불신과 불화의 요인으로 싹트게 했다. 때문에 이승만은 1920년 4월 7일 구미위원부에 보낸 서신에서 구미위원부의 의결사항은 반드시 자신에게 보고하고 승인받으라고 지시했다. 위원장 김규식은 독자적인 결정권을 잃고 세세한 문제까지 보고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장재 송헌주가 자신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며 그를 불신했다. 

구미위원부를 이끌어가는 김규식과 송헌주에 대한 불신은 이승만 외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구미위원부가 만든 지방위원조례가 기존 국민회의 위상을 손상시킨다고 판단한 하와이지방총회는 독립공채 발매 등 재정관할권을 구미위원부의 지방위원부가 아닌 국민회가 장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더구나 하와이지방총회는 지방위원의 조례를 김규식과 송헌주가 주도해 만든 것인 양 오해해 구미위원부에 반감을 갖고 1920년 2월부터는 재정 지원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송헌주가 1920년 7월 6일 하와이에 도착한 후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종관을 하와이지역 공동시찰로 임명하는 선에서 잘 무마했다. 하지만 이 일로 송헌주는 같은 해 7월 22일에 이승만으로부터 사임 요구를 받았고 여기에 아무 응답을 하지 않자 7월 30일 이승만은 그를 해임하였다. 

김규식은 송헌주의 해임 소식에 격앙해 8월 7일자로 위원장 사임서를 이승만에게 제출했다. 김규식은 1920년 1월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3월에는 뇌종양 수술까지 받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재정 수합도 뜻대로 되지 않아 구미위원부를 계획대로 꾸려가는 것조차 벅찬 상황이었다. 그런데다 위원장으로서의 독자적인 활동에 제약을 가하려는 이승만에 대한 불만도 쌓인 상태였다. 당초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 때 못다 한 외교활동을 구미위원부를 통해 제2의 선전 외교활동으로 이어가려 했으나 국제연맹 창설을 주장한 윌슨 대통령이 1919년 9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그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더욱이 1920년 3월 미 의회에서 미국의 국제연맹 참여를 최종 부결함으로써 더 이상 미국에서의 외교활동도 전망하기 어려웠다. 이런 마당에 송헌주 해임사건까지 터지자 그동안 쌓였던 불신과 불만이 위원장의 사임으로 나타났다. 결국 김규식은 1920년 10월 3일 장기 휴가를 명목으로 워싱턴 DC를 떠나 상하이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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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위원부 주역들(왼쪽부터 김규식, 이승만, 송헌주)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와 미주 한인사회의 분열

이승만은 1920년 9월 28일 현순과 정한경을 구미위원부 새 위원으로 선임하였고, 김규식이 워싱턴을 떠나자 현순을 임시위원장 겸 장재(掌財 : 재무책임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현순은 워싱턴 DC에 독자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대표부를 설립하고 미 국무부에 한국독립의 승인을 요구하다 마찰을 빚어 1921년 4월 이승만으로부터 해임되었다. 그 후임으로 이승만은 서재필을 임시위원장에 임명했으나 서재필은 워싱턴군축회의가 끝난 1922년 2월 사임을 발표하고 구미위원부에서 떠났다. 이렇게 되자 구미위원부는 더 이상 위원장이 없는 명목상의 조직으로 추락했다.

워싱턴군축회의(1921. 11. 12. ∼ 1922. 2. 6.)가 끝난 뒤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 관내 독립운동계는 대미 외교에 대한 불신과 회의론이 일어났다. 미주 한인사회에는 독립운동의 열기가 급격히 냉각됐고 재미 한인들의 경제 상황마저 악화되어 구미위원부는 임정 송금은커녕 자체 유지조차 힘들었다. 이런 가운데 중국 관내에 이승만을 불신하는 반임정 세력은 확장되었고, 그 영향은 임정 개조를 둘러싼 국민대표회의와 임정의 급격한 위상 추락으로 나타났다. 

임시정부는 위상 추락의 원인을 대통령으로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이승만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1921년 8월까지 구미위원부가 정기적으로 자금을 송금할 때까지 임정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다가 송금이 끊기고 임정의 위신마저 추락하게 되자 구미위원부와 이를 설립한 이승만에게 책임을 돌린 것이다. 이승만이 임정의 조치에 크게 반발하자 임시정부는 1925년 3월 10일 구미위원부 폐지명령을 공포하였고 3월 23일에는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 면직 처분을 내렸다. 면직 사유는 이승만의 장기 궐석에 따른 대통령으로서의 역할 부재와 구미위원부의 사유화 때문이라 했다. 

대통령직에서 면직 처분된 이승만은 임정의 폐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에서 새 외교기관으로 주미외교위원부를 설립할 때까지 구미위원부를 계속 유지 및 운영하며 임정의 폐지 명령에 반발했다. 임정의 면직 처분에 격분한 이승만의 지지세력인 하와이 교민단과 동지회는 1920년대 중반부터 반임정 세력으로 변모하였다가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임정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구미위원부 폐지와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 처분 이후 미주 한인사회는 1941년 4월 임정 봉대를 내세워 재미 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해 대동단결할 때까지 크게 이승만 지지세력과 반이승만세력, 그리고 두 세력에 가담하지 않은 독자적인 집단으로 나누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