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반목했던 연개소문과
양만춘, 적 앞에서 손잡다

반목했던 연개소문과<BR />양만춘, 적 앞에서 손잡다


글 김종성 역사작가



반목했던 연개소문과 양만춘, 

적 앞에서 손잡다



고구려는 전쟁을  잘하는 나라였다. 그런 고구려에게 가장 힘겨웠던 상대는 마지막에 만난 당나라였다. 당나라는 그때까지 출현한 중국 왕조 중 ‘역대 최강’이었다.


당나라의 탄생과 고구려의 서수남진 정책 

304년부터 5대 유목민이 북중국에 16개 왕조를 순차적으로 세우는 가운데, 기존의 중국 지배층은 양쯔강쪽으로 남하했다(5호 16국 시대). 이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면서 남중국과 북중국에 원칙상 각각 하나의 왕조만 존재하는 남북조시대가 이어지다가, 589년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618년에 당나라가 재통일을 이룩했다. 304년 이후의 대혼란을 거치면서 중국 문명의 중심부는 북중국 황허 유역에서 북중국 황허 및 남중국 양쯔강 유역으로 이원화됐다. 중국 문명권이 그만큼 확장된 것이다. 또 유목 문명이 유입되면서 농경 문명과 융합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북방 유목민(胡)의 문명과 한족 농경민(漢)의 문명이 융합된 이것을 역사학에서는 호한(胡漢) 문명이라고 부른다. 당나라는 이전보다 확장된 문명권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이전 문명보다 우수한 호한 문명에 기초를 둔 나라였다. 진나라나 한나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왕조였던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는 고구려가 그때까지 상대한 나라 중에서 가장 떨리는 적이었다. 

고구려에 대패한 수나라가 멸망하자, 중국은 다시 분열됐다. 중국을 재통일하고 626년에 황제가 된 당나라 태종(당 태종) 이세민은 628년 초원지대 강자인 돌궐족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631년에는 고구려에도 도발을 걸었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꺾은 것을 기념해 세운 경관(京觀)이란 조형물을 당나라 사신들의 손으로 파괴한 것이다. 이에 고구려 영류태왕(재위618~642년, 태왕이 정식 명칭)은 천리장성을 쌓아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당나라에 태자를 보내 조공하면서 화친을 시도했다. 장수태왕 때인 427년 만주 국내성에서 한반도 평양성으로 천도한 것을 계기로 고구려는 서수남진(西守南進) 주의를 고수했다. 서수남진은 서쪽과는 현상을 유지하고 남쪽으로 진출을 꾀하는 전략이었다. 북중국에 북위라는 강대국이 등장하면서 5호 16국 시대가 남북조 시대로 넘어가자, 장수태왕은 서쪽 중국보다는 남쪽 한반도로 진출하는 쪽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서진주의를 폐기하고, 중국 진출을 보류한 것이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 역대 제왕들은 서진주의나 서남 동시공략 주의를 썼다”며, “서수남진 주의를 쓴 것은 장수태왕 때부터”라고 설명한다. 당 태종이 도발하는데도 영류태왕이 방어적으로 나온 이유는 바로 이 서수남진 주의 때문이다. 

당나라가 세워지기 전인 612년에 수나라를 물리친 을지문덕은 서수남진 주의를 수정하자고 제안했다. 살수대첩의 여세를 몰아 중국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조선상고사』에 인용된 『해상잡록』에는 을지문덕이 중국 정벌을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조선 후기 역사학자 겸 실학자인 안정복도 『동사강목』에서, 영양태왕이 을지문덕을 등용해 수양제를 추격했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아 기회를 놓쳤노라고 안타까워했다. 이처럼 영양태왕도 서수남진을 고수했다. 그의 동생인 영류태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안시성을 사수하다 

서수남진을 고수한다고 해서, 당나라가 침략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고구려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데도 당나라는 자극을 가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고구려를 자국 행정구역에 편입하는 것이었다. 훗날 백제를 멸망시킨 뒤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사실에서 나타나듯 당나라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국 행정구역에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큰 나라는 도호부로, 작은 나라는 도독부로 만들고 싶어했다. 당 태종의 아들인 당 고종 때 안서도호부·안동도호부·안북도호부·안남도호부가 수립된 것은 그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됐음을 의미한다. 

당나라가 이러한 의도를 갖고 고구려를 자극하니 서수남진을 고수한다 해서 평화가 유지되리란 보장은 없었다. 결국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했다. 645년 흔히 안시성 전투로 불리는 고구려·당나라 전쟁(고당전쟁)이 발발했다. 당나라군 10만과 거란 및 돌궐 지원부대 5만을 합한 15만 군대가 쳐들어왔다. 전투 초반에는 당나라가 우세했다.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 서부전선의 개모성·비사성·요동성·백암성을 점령했다.고구려의 서쪽 담장을 상당 부분 허물어트린 것이다. 이 담장이 다 무너지면 만주평원을 가로질러 압록강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초반부터 상승세를 탄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 서부전선의 또 다른 요충지인 안시성을 상대로 충력을 집중했다. 직접 지휘봉을 잡은 황제 이세민은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의 공략에 혼신을 기울였다. 평양성 실권자 연개소문이 15만 병력을 파견하며 안시성을 지원했지만, 해당 부대는 적군에 패하거나 투항했다. 이로써 안시성의 고립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안시성이 무너지면 고구려 조정이 기댈 곳은 안시성과 평양성의 중간인 오골성뿐이었다. 오골성마저 무너지면 평양성도 위험했다. 그러나 이세민 군대는 평양성은 물론이고 오골성에도 가지 못했다. 안시성이 지뢰가 되어 발길을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당나라군이 압도적 공격을 가해도 안시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나라가 토산을 쌓으면 안시성은 성벽을 더 높였다. 당나라는 성벽 파괴용 무기인 충거와 포거를 사용했고, 고구려는 무너진 데를 다시 목책으로 메웠다. 이런 식으로 하루 6~7차례 전투가 벌어졌지만, 안시성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태종은 ‘안시성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60일간 주야로 연인원 50만을 투입해 거대한 토산을 쌓았다. 그러나 토산이 완공되던 날, 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지지 않은 곳에 올라 공격을 벌인 쪽은 당나라가 아닌 고구려군이었다. 이런 와중에 날씨마저 쌀쌀해지고 군량미도 부족해지자 당태종은 철군을 결심했다. 고구려 서부전선을 상당 부분 무너트린 데 만족하고 안시성에서 회군한 것이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당 태종이 철군할때 양만춘이 성벽에 올라 “잘 가시라”고 인사하고, 당 태종은 비단 100필을 선물하면서 “당신들 대단하다”고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이 같은 대승리에 힘입어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고구려를 승리로 이끈 세 가지 

당나라가 그때까지 등장한 동아시아 국가 중 역대 최강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의 승리는 일반의 예상을 깨는 위업이었다. 고구려가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나라 침공 3년 전에 서수남진을 폐기하고 남수서진(南守西進)을 채택한 것이 항전 태세를 튼튼히 하는 데 도움이 됐다. 642년에 고구려 국가전략이 ‘백제·신라와는 현상을 유지하고, 당나라와는 정면 대결하는 쪽’으로 180도 뒤바뀐 것이다. 고구려 서부의 토착 귀족인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일이 대전환의 계기가 됐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장수태왕 이래로 철석같았던 서수남진 정책을 남수서진 정책으로  바꾸었다”라고 설명했다. 

둘째, 연개소문의 쿠데타 이후 귀족연합체가 타파되고 중앙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당나라와의 총력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 태왕은 힘이 없었다. 나라를 주도하는 것은 지방분권적인 귀족들이었다. 연개소문은 영류태왕을 죽이고 보장태왕을 옹립한 뒤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강력한 권력을 구축했다. 강권 혹은 독재 정치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645년 전쟁에서는 고구려를 지키는 힘이 됐다. 

셋째, 자칫 쪼개질 수도 있었던 고구려인들의 일심단결이 대승리를 뒷받침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은 왕족이 아닌 귀족이었다. 그래서 경쟁자인 여타귀족들이 그를 방해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양만춘도 연개소문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당나라 군대 앞에서 손을 잡았다. 연개소문이 안시성에 15만 구원군을 보낸 것, 양만춘이 당 태종과 끝까지 싸워 연개소문 정권을 지켜낸 것은 고구려인들이 적 앞에서 사심을 억눌렀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국가 전략이 수정되고 역대 최강 정권이 탄생했다. 여기에 고구려인들이 사심을 억누르며 단결하니 당 태종은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중상을 입은 채로 귀국길에 나섰다. 전투 중에 화살을맞아 한쪽 눈을 실명한 것이다. 당 태종은 그렇게 쓸쓸히 귀국하여 병상에 누워 있다가 649년 50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alt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의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