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장제스와 쑹메이링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BR />장제스와 쑹메이링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장제스와 쑹메이링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적인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임시정부가 국제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중국 최고 지도자 부부의 도움은 제법 든든했다. 마침내 국제회담에서 ‘한국독립’의 승인을 이끌어낸 것도 바로 이들 부부였다.


중화민국 최고 지도자 장제스가 되다 

1911년 10월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중국에는 공화국인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주권 의식을 가진 국민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화국의 운명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지도자 쑨원(孫文)과 정치적 타협으로 대총통 지위에 오른 위안스카이(袁世凱)가 혁명을 배반하고 황제제도를 부활시킨 것에서 공화혁명의 한계를 엿볼 수있다. 위안스카이가 갑자기 병사한 후, 군대를 소유한 군벌들이 각 지역을 나누어 통치하는 군벌시대가 도래했다. 군벌시대를 끝내고 통일된 국가의 수립은 중국혁명의 궁극적인 귀결점이었다. 

1924년부터 1928년에 걸친 이른바 국민혁명은 국가적 통일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최고 지도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장제스(蔣介石)이다. 그는 국민혁명의 출발점이 된 국공합작과 소련과 연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비교적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장제스는 러시아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으로 설립된 황푸군관학교의 교장이자, 이 학교 출신의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2년여 ‘통일전쟁’의 결과로, 1928년 6월 베이징(北京)에 입성함으로써 국가적 통일을 완수하는 대업을 달성했다. 마침내 이를 기반으로 중앙집권적통일 정부가 수립되었다. 난징(南京)을 수도로 하는 국민정부 탄생은 명실상부한 통일 정부를 의미한다. 1949년 대륙에서 패퇴하여 타이완으로 옮겨갈 때까지 장제스는난징 국민정부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서 대륙을 호령하는 인물이었다.


국제정세 밝은 쑹메이링이 등장하다 

쑹메이링(宋美齡)은 1897년 상하이의 유복한 기업가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쑹쟈수(宋嘉樹)는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선교사로 귀국한 이후 성경 번역·출판이나 제분업 등을 운영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이에 쑹메이링은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명문 웨슬리대학교에서 당대 최고의 근대교육을 받았다. 쑹메이링의 이러한 경험은 사상이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당대 서구의 최고 지식인들과 교류에 전혀 어려움이 없을 만큼 서구적 지식과 문화에매우 익숙하였다. 

큰언니 쑹아이링(宋靄齡)은 중국 최고 재벌인 쿵샹시(孔詳熙)의 부인이 되었다. 둘째 언니 쑹칭링(宋慶齡)은 중국혁명의 아버지로서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대총통이었던 쑨원의 부인이다. 오빠 쑹즈원(宋子文)은 쑨원과 장제스의 주요한 협력자로 재정부장·외교부장·행정원장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쑹메이링 세자매에 대해 흔히 “한 명은 돈, 한 명은 권력, 한 명은 중국을 사랑했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서로 다른 인생 항로에 따라 만나지 못하는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남북분단에 따른 이산가족의 아픔도 되새길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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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메이링 세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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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주석



부부의 인연을 맺다 

유학에서 돌아온 1917년 이후 쑹메이링은 상하이 사교계의 가장 주목받는 여인 중 한 명으로 두각을 드러내었다. 1922년 형부인 쑨원 소개로 장제스를 만났다. 어머니 니쟈젼(倪佳珍)과 언니 쑹칭링의 반대에도 1927년 12월 결혼하여 최고 지도자의 부인이 되었다. 장제스가 1928년 무렵부터 1949년까지 대륙의 지도자로 군림하였으니 쑹메이링도 약 20년 동안 중국 퍼스트레이디였던 셈이다. 장제스와의 결혼은 정략결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쑹메이링은 장제스가 기왕의 결혼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자신과 결혼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장제스는 전통적인 기독교도인 쑹메이링 집안을 설득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할 만큼 절대적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평생 충실한 기독교도로서 종교적인 삶을 살았던 것은 이러한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장제스에 대한 쑹메이링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장제스의 생애 중 가장 큰 위기인 1936년 12월의 시안(西安)사변이 일어났다. 그녀는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장제스를 억류하고 있던 장쉐량(張學良)과 협상을 중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쑹메이링이 중국인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국민정부 총통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다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은 장제스가 황푸군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인 청년들의 입학을 허용하면서 시작되었다. 1932년 4월 상하이의 윤봉길의거는 한중의 국제적인 연대를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그는 윤봉길의거를 “중국 백만 군인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 청년 한 사람이 해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표면적인 평가와 달리 직접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상하이 침공과 괴뢰정권 만주국 수립 등 복잡다단한 정세 변화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윤봉길의거는 한국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인식 변화를 불러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에 기반하여 지원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국민정부 조직부를 통한 임시정부 지원이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중국국민당의 준군사 조직이었던 삼민주의역행사의 황푸군관학교 출신 김원봉 계열에 대한 지원이었다. 이중의 지원은 장제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혼선을 초래하기도 했다. 

장제스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은 임시정부가 1940년 충칭(重慶)으로 이전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임시정부는 사실상 독자적 기반을 가지지 못한 채 장제스와 국민정부의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물론 국민정부의 지원 내막에는 약소민족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라는 긍정적 의미만 있지 않았다. 

당시 임시정부의 중점적인 활동 목표는 조국독립을 추진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는 군사조직을 만드는 일이었다.이와 더불어 외교적 활동을 통하여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승인을 받는 문제였다. 

한국광복군 창설을 둘러싼 임시정부와 국민정부 사이에 벌어진 논의나 광복군의 운영 실태는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이라는 ‘중한호조’의 측면과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외국군에 대한 통제와 예속이라는 측면도 공존하고 있었다. 국민정부의 “한국광복군 행동9개준승”은 임시정부에 대한 독자적인 군사권 행사를 제한하는 독소조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사이에 쌓인 신뢰로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임시정부에 대한 외교적 승인 문제는 장제스와 국민정부 측에서 적극적인 승인보다는 소극적이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다른 열강, 특히 미국이나 러시아 등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나아가 전후 한반도에서 영향력 확보와 임시정부에 대한 견제 및 통제라는 의도도 있었다.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 승인을 이끌다 

쑹메이링이 독자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사실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장제스가 한국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날 때 부인으로서 늘 배석하여 지지를 표명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외국어에 능통했던 까닭에 장제스의 정치 활동을 여러 측면에서 도왔다. 정부를 대표하여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났던 그녀는 일제 침략의 부당함과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중국 외국항공용병대 창설과 미국 참전을 이끌어냈다. 미국과 중국의 긴밀한 관계가 구축되면서 1937년 미국 잡지 time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으로 그녀를 선정했다. 이어 1943년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의회 상하 양원 연석회의에서 중국 제1부인(First Lady) 신분으로 연설하였다. 당시 중국인으로는 최초, 외국 여성으로는 두 번째였다. 국제무대에서 그녀의 활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맞았다. 미국 대통령은 “선교사가 미국에 예수를 전했듯이 쑹메이링은 미국에 중국을 알렸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943년 11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창으로 이집트에서 카이로회담이 개최되었다. 회의를 주도한 미국은 전후 아시아 지역의 국제관계 재정립에 중국의 주도권 회복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4대 강국’ 일원으로 참석한 장제스는 미국과 협력이 절실했다. 장제스는 회의에서 즉각적인 한국독립을 처음 주장하였다. 그런데 선언문 수정 과정에서 미국 측의 국제 공동관리(신탁통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장제스 주장과 루스벨트의 수정을 거쳐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라는 전제가 붙은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이는 한국독립에 대한 장제스의 지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지지 덕분이었다. 물론 한국인이 염원하는 ‘절대 독립’이 아니었다는 한계는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국제회의에서 처음으로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한 인물은 장제스였다.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한국독립을 위해 한 역할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통역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녀는능숙한 영어 실력으로 루스벨트나 처칠 등 세계 최고 지도자들과 회담에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장제스가 즉각적인 한국독립 문제를 거론한 부분은 한국독립에 대한 쑹메이링의 지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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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장제스와 쑹메이링



한국과 반공혈맹으로 돈독한 관계로 이어지다 

일제 패망 후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했다. 대대적인 환송연에 참석한 이들 부부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러한 사실 또한 부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53년 한국 정부는 장제스에게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1966년에는 쑹메이링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으로 타이완을 방문하고 장제스와 ‘반공혈맹’의 관계를 돈독히 하던 때였다. 장제스와 쑹메이링 부부의 지원은 ‘국제적인 미아’ 신세였던 임시정부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커다란 울림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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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송연